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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늘 당신 곁에 계시는 하나님 (롬 8:28~38)

247호 · 2004-11-18

어머니가 뱃속에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자신은 없고 오직 자식만을 위해 삽니다. 싫어하는 것도 뱃속의 자식을 위해 먹고, 자식을 위해 폼 나지 않는 옷을 마다하지 않고 그렇게 아이를 지키며 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식이 태어나면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기르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이름조차 버리고 오직 ‘누구의 엄마, 아빠’로 살면서요. 그러다 혹 아이가 아프면 애간장이 녹고, 아이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밤잠을 설치며 가슴 아파하며, 세상에서 자식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고 일을 합니다. 그래도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고, 공부라도 좀 잘하면 고생이 고생인 줄 모르고 행복해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래서 자식 앞에서 부모는 늘 ‘팔불출’ 곧 바보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같습니다. 아니, 부모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고, 작별의 순간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능이 없고, 무한한 것이어서 부모의 사랑 이상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셔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보호하시며,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어.”

한 성도가 고난 중에 한 꿈을 꾸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눈이 하얗게 쌓인 벌판에 발자국이 두 개가 찍혀 있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소리쳤습니다. “보세요. 이 눈보라 속에 하나님은 어디 가시고 저 혼자 걸은 발자국만 남아 있잖아요? 그러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곧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발자국을 잘 봐라. 저것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성도는 놀라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제 발자국은 어디 있지요?” 하자 “너는 내가 안고 걸었기에 발자국이 없지. 난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단다.” 성도는 그 말씀에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셨는지 알면 그렇게 가벼이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떠나시겠습니까? 어떻게 한 시라도 우리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욥이 자식이 죽어나가고, 재산이 다 날아가고, 아내가 떠났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 하는구나.”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욥과 함께 계셨고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가슴을 저리며, 숨죽여가며 늘 함께하셨습니다. 자식이 고난 중에 있는데 부모가 어디 놀러 가겠습니까? 더 아프고 더 가슴이 저린 것이 부모 마음이듯, 하나님도 자녀가 연단 중에 있을 때 겪어야 할 과정이라 참고 계시지만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늘 곁에 계시는 것입니다.

못난 자식에게 더 끌리는 것처럼, 자식이 병들었을 때 부모가 병상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병든 당신 곁에, 실패한 당신 곁에 더욱 가까이 계십니다. 로뎀나무 아래로 절망한 엘리야를 찾아가 먹이고 위로하신 하나님이 지금 당신 곁에 그 심정 그대로를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말 안 듣는 자식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베드로가 실수했다고 야단치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남들은 그럴 수 있지만 배 아파난 어미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넣어서라도 바른 자식을 만드시려고 했고,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를 부인한 죄책감에 넋 놓고 있는 베드로에게 다가가 물고기를 구워 먹이며 용서해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야단치고 회초리를 드는 것은 내 자식이란 증거요, 아직도 사랑하고 있음입니다. 그 자식이 말 듣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비의 심정으로, 바람난 아내를 기다리는 호세아처럼 하나님은 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출산하면서 유독 고생하는 산모들이 있습니다. 산모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까지 가면서 자식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부모들은 더더욱 자식이라면 벌벌 떱니다.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얻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이겠습니까! “네가 어떤 자식인 줄 아느냐?”

자식이 부모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것에 십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래서 ‘치사랑’이라고들 합니다. 자식이 먼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정말 감격적입니다. 우리처럼 별 볼일 없는 죄인을 그 크신 분이 먼저 사랑하사 ‘사랑앓이’를 하셨다니…. 이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포도원에서 일하던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포도원에서 막일을 했던 여인이니 계달의 장막 같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궁에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았을 텐데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만을 사랑했습니다. 아가서에는 솔로몬의 연가(戀歌)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사랑함으로 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그려놓은 것입니다. 계달의 장막 같은 우리를 주님이 사랑하사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고 넘치는 사랑으로 안으셨습니다. 그 사랑은 완전하며, 변하지 않으며, 무궁한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 중에 있을 지라도, 당신이 칠흑 같은 어두운 밤길을 걸을 지라도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당신을 지키고 계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저는 목회 20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물 없는 사막이요, 눈 덮인 산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물은 없었지만 주님이 계셨고, 눈은 덮여 있었으나 주님이 동행하고 계셔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 생수가 되사 저를 먹이시고, 저보다 앞서 가사 눈 위에 길을 내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데 이렇게 힘드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스데반이 돌로 맞을 때 하나님이 왜 잠잠히 계셨을까요? 세례 요한이 목이 잘릴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 못함이 아닙니다. 귀가 둔하여 고통소리를 못 들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며 더욱 깊고 크십니다. 그 분의 뜻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는 못하나 분명히 그 분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시는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어느 어미가 젖 먹는 아들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잊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의 출입을 알며, 얼굴만 봐도 무슨 일이 있는지 압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신음소리만 듣고도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다 아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성장하다보면 아플 수도, 조금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눈 먼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힘을 냅시다. 할렐루야!

다섯 손가락 깨물어 봐라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어미가 젖먹는 아들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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