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성에 젖지 말라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거나 행사장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 정말 조국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릅니까? 아마 대개는 가사를 구구단 외우듯 씹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애국가를 불러와서 이미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국가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응당 부르는 노래, 행사 때 부르는 노래쯤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딴 선수들이 수상식장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는 달라 보입니다. 그들이 게양되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따라 부르는 애국가는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감격이 봇물일 듯 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성에 젖는 일처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의식이 없이 습관화, 의무화 되는 것, 그것은 문둥병이 걸린 것입니다. 감격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 말입니다. 즉 목사로서 설교해야 하니까 성경 보고 그것을 노트화 해서 전하고, 집사니까 주일이면 하던 일이니까 봉사하고, 성가대니까 의례히 찬양하는 것, 이런 것이 다 타성에 젖은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먼저 말씀에 은혜를 받지 않고 외치는 것은 강의지 설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파장이 없는 것이기에 절대 성도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또 집사가 감사 없이 일하는 것은 기계로 움직이는 로봇이 일하는 것이지 절대 봉사라고는 할 수 없고, 성가대가 은혜에 사무치지 않고 성가대에서는 것도 합창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할일들은 다했으니 사람으로서 탓을 잡을 수는 없지만 분명 큰 문제요, 두려운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하나도 열납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그런 타성에 젖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원래 큰 병일수록 자각증상이 없다고들 합니다. 대장암은 암 중에 치사율이 제일 높은데 이것의 자각증상은 거의 없답니다. 그래서 죽을 때에야 비로소 그 병을 알게 된답니다. ‘내 신앙이 이러면 안되지.’ 하고 조기진단하면 천만다행이나 문제는 자신은 주의 일을 잘하고 있어 올바른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선교 차 유럽에 나가보면 웅장한 교회 건물이 관광지가 되고 박물관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나를 진단해 보면 원인은 신앙의 문둥병이었습니다. 경건의 모습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상실되고, 머리는 있으나 가슴이 결여되어 하나님에게서 점차 멀어져 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찾아 가시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 탄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나태함과 무감각이 그 원인입니다. 이러다 유럽교회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촛대가 옮겨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깨어나야 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갈아엎어져야 합니다. 즉 기경(起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래 갈지 않아 딱딱하게 굳어진 땅을 엎듯, 팍팍한 심령, 무감각해진 심령을 갈아엎어 옥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빗물이 스며들 수 있듯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스며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비가 없이 어찌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찌 열매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엎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묻혀 있던 돌을 빼내고, 가시 덩굴을 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계와 우리 각 심령의 당면 과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 저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대답을 합니다. “첫사랑을 잃지 않은 것이 제 성공의 비결입니다. 처음 주를 만나 감격하고 뜨거웠던 그 사랑을 항상 지니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게 껍질은 있으나 살이 없다면 그냥 버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의 형체는 있으나 믿음의 실체가 없다면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대장암 말기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죽을 병에 걸린 자들임을 몰랐습니다. 전혀 자각증상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들의 신앙에 만족하고 자만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며 눈 멀고 벌거벗은 자였던 것입니다. 마치 그들은 초등학교 시절 읽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는 듯 합니다. 벌거벗었으나 남들이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하니까 정말 그런 줄 아는 어리석은 왕 말입니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용납치 않으십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 말씀은 필경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와 같으면 우리도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영적 회복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첫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고 은혜의 바다에 푹 잠겨야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해야 합니다. 불로 연단하라 하심은 믿음의 시련을 통해 강건한 믿음을 소유하라는 것이고, 흰옷을 입으라 하심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옷을 입으라는 것이며, 안약을 사라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 영적 소경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당신의 심령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둥병인 사람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심령을 갈아엎은 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당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십시오. 심령이 깊은 잠에 빠져 있나, 아니면 아예 죽었는지 지금 점검해야 합니다. 암도 조기 발견하면 살 듯 영적인 병도 조기 발견하면 살 수 있습니다. 마음에 육의 것으로 가득 찬 자는 영이 죽은 것이고, 위엣 것을 바라보지 않고 계속 아래 것들만 바라보는 자도 죽은 것입니다. 죽은 자의 고개는 절대 하늘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며,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가지 않으면 그 해바라기는 겉은 멀쩡해도 뿌리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사도바울이 매일 자신을 쳐서 육을 죽였던 것처럼, 자신을 그리스도의 착고에 채워 복종시켰던 것처럼 우리도 육신과 싸워 이기고 내 안에 그리스도 영으로 가득 채웁시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칭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 내 신앙이 완전하다 할 수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신앙의 무감각, 신앙의 로봇화가 당신을 영원한 재앙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잠겨 그 감격과 감동이 늘 내 심령 안에 물결쳐야 참 그리스도인이요, 참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바람든 무는 맛이 없습니다. 신앙도 바람 들면 맛이 없어 버림을 당합니다. 늘 싱싱한 신앙, 살아있는 믿음을 간직합시다. 할렐루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감각이 없는 것은 문둥병자며 감동이 없는 것은 로봇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