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만남은 변화를 낳는다 (막 5:25~34)
아이들이 장성하면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자식을 낳게 되지요. 아이가 어떻게 태어납니까? 아이는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합해져 이뤄진 생명체입니다. 정자는 보통 수천에서 수억 개가 한꺼번에 배출되나 정작 난자와 합해져 생명체를 이루는 것은 단 한 개입니다. 나머지는 도중에 길을 잃거나 건강하지 못하여 탈락하게 된다고 합니다. 한 개의 정자와 한 개의 난자의 진정한 만남이 신비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그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듯 진정한 만남은 무언가를 창출하고,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면 여자든, 남자든 변합니다. 외모도 아름다워지고, 부드러워지며, 아량이 넓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냥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남’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들과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남이 접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만남이란 거리 간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교회 뜰을 밟고, 교회행사에 참여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변화되었습니까? 새로운 생명체가 되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나 아무런 변화가 일지 않는 것을 저는 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는 예수에게 접근을 했으나 예수와 진정한 만남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나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나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같은 목사 밑에서 듣고 배워도 어떤 이는 예수의 언저리만 도는 자가 있고, 어떤 이는 예수에게 제대로 접촉하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사과를 만지는 것으로 사과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과를 먹어봐야 사과를 아는 것입니다. 밤도 밤톨의 가시를 제거하고 딱딱한 껍질을 벗기고 떫은 속껍질을 벗겨야만 진짜 밤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댑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를 에워싸고 있는 중에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쯤이야 다반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 이 여인 한 사람 뿐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의 제자들은 “참 스승님도 별 말씀 다하십니다. 사람이 많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데 그리 말씀하시면 곤란하지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 많은 무리 중에 진실된 만남, 온전한 접촉(接觸)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이 놓여 건강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진실된 만남, 온전한 접촉이 이 여인을 병에서 놓임 받게 한 것입니다. 예수와 진실된 만남은 이처럼 변화를 낳습니다. 세상적인 것들이 싫어지고, 구습이 잘라져 나가며, 삶 전반에 기쁨이 일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요. 사도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기고만장한 청년이었습니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래서 무서울 것도 없는 혈기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진정한 만남이 있은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옛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전부 던졌던 것입니다. 완전한 만남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 만남으로 새로운 가치관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세상의 쾌락에 취해 흥청망청 했습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라고 돈을 섬겼고, 세상에서 한 자리 해보려고 갖은 노력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가 찾아오셨고 저는 그 예수와 진한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토록 즐기던 세상일들이 순간 싫어졌습니다. 365일 즐기던 술이 싫어졌고, 하루 몇 갑씩 피우던 담배가 역겨워 입에 댈 수 없었습니다. 또 세상에 있을 때는 그렇게 대단해 보이던 것들이 하찮게 여겨지면서 제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수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임신한 여인이 시큼털털한 것만 챙기는 것처럼 저도 세상눈으로 보면 시큼털털한 것들, 기도와 찬송이 늘 입에 맴돌았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 놀라운 사실은 예수와 진정한 만남이 있은 후 제게 예수의 능력이 나타났고, 예수의 사랑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고, 축복을 하면 축복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정말 저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니 예수와 만나 하나가 되면 그런 현상들은 정상이라고 씌어있지 뭡니까?
예수와 하나가 되면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전기를 만지면 내 몸에 전기가 흘러 감전되잖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와 완전한 접촉이 있으면 예수의 능력과 사랑과 생명이 내 안에 넘쳐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인해 감전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한전에서 전류를 계속 내보내고 있는데 불이 안 들어오거나 TV가 안 켜진다면 전기 접촉 부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다. 당신의 생활이 아직 어둡고 깜깜한 까닭은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이물질, 즉 막힌 담이 있거나 아니면 선이 끊어져 완전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와 늘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회계담당이었으니 예수 가까이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와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다. 즉 교통이 없었다는 겁니다. 진정한 접촉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는 밝은 빛이 옆에 있는데 선글라스를 쓴 셈이지요. 아무리 빛이 강렬해도 선글라스를 쓰면 차단되고 말지요. 예수와 가까이 있어도 막는 무엇인가가 놓였다면 하나가 될 수 없지요. 그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 돈을 챙긴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와 진정한 만남을 갖는다면 가난이 당신 안에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아플 수도 없습니다. 지혜가 부족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축복과 기적과 지혜와 명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완전한 접촉으로 하나가 되면 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대화가 있는 가정은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대화가 만남의 통로가 되거든요. 그러나 서로 겉도는 가정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업도 노사가 하나가 되면 서로 머리에 띠 두르고 싸움하겠습니까? 서로 따로 놀기 때문에, 서로 안 통하기 때문에 힘겨루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예수께 다가가 옷자락을 잡으십시오. ‘예수님 아니면 저는 죽습니다’ 하는 각오로 예수의 옷자락을 힘껏 잡으십시오. 당신의 문제가 꼭 해결될 것입니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통하지 않게 됩니다. 통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길어지면 원수가 되는 법입니다. 예수와 지금 통하지 않으면 나중 예수와 원수가 됩니다. 오늘 진정으로 예수와의 만남을 갖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신통하면 인통하고 인통하면 물통한다
대화가 단절되면 오해가 싹트고 오해가 길어지면 원수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