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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외눈박이 인생에서 깨어나라 (수24:1~15)

219호 · 2004-05-04

원숭이가 어느 날 외출을 했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한 동네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외눈박이 원숭이들만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참 괴상하게도 생겼다’하고 신기하듯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들의 놀이방식이 자신이 살던 곳과는 달리 굉장히 재밌어 보이는 겁니다.

또 그들이 먹는 것을 보니 여태껏 자신은 구경조차 못한 맛있는 것이어서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이 원숭이는 슬슬 외눈박이 원숭이 곁으로 다가가 관심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눈을 가진 원숭이를 이상한 듯 쳐다보고 자기들끼리만 놀았습니다.

어떻게든 외눈박이 원숭이와 함께 하고픈 두눈박이 원숭이는 고민 고민하다 결단을 하게 됩니다. “나도 외눈박이가 되면 저들의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는 돌 하나를 들어 자신의 눈을 쳐 빼냈습니다. 그리고 외눈박이 원숭이에게 가서 “나도 너희들과 같이 이제 외눈박이야”하자 그들이 환대를 해주며 친구로 맞아주었습니다. 외눈박이가 된 원숭이는 행복했습니다. 자신이 병신이 된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눈박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상인 줄 알고, 그것이 행복인 줄 알고 한 눈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눈이 있어야 정상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두 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과 세상을 감지할 수 있는 육적인 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두 눈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 한 쪽 눈으로 사는 자들이 더 재밌어 보이고 더 행복하게 보입니다. 절제하지 않아도 되고, 갈등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한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에라’라고 한 눈을 빼내고 마는 어리석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정상적인 자들의 것임을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자들만 들어간다는 사실을요.

요셉은 우상이 판을 치는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곧 외눈박이 원숭이 동네에 간 셈이지요. 거기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외눈박이 동네에서는 두 눈 가진 자가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한 눈을 빼라고, 하나님을 버리라고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한 눈을 질끈 감고 즐기자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두 눈을 부릅떠 하나님을 우러러 봤고 상황을 직시해 자신을 지켰습니다. 물론 환난이 그 앞에 왔으나 결국 하나님이 이를 어여삐 보사 그를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달랐습니다. 그는 기근이 오자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외눈박이들의 먹이가 탐나 한 쪽 눈을 빼낸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습니까?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참혹한 아픔을 겪게 됩니다.

두 눈이 있는 자가 정상적인 자요, 아름다운 자입니다. 한 눈을 빼낸 흉측한 몰골로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요즈음 많은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와 방송 그리고 신문사가 제게 와서 귀신을 쫓지 않는다면 이단이란 타이틀을 벗겨주겠다고 합니다. 금방 저의 위신이 바로 설 것이며 입지가 구축될 것이라고 귀발림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한 눈을 빼면 같이 놀아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미쳤습니까? 왜 눈을 뺍니까? 왜 자청해서 병신이 되겠습니까? 제가 경험한 하나님, 제가 본 예수가 확실한데, 두 눈이 정상임을 믿는데 왜 외눈박이가 되겠냐는 겁니다. 아무도 안 놀아줘도, 다 저를 왕따 시켜도 저는 두 눈으로 살 것입니다. 예수가 내 편이신데 제가 왜 왕따 입니까? 제가 저들을 왕따 시키고 예수와 더불어 당당하게 살 겁니다.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너희들 세상이 부럽냐? 외눈으로 살고 싶으면 살아라. 나와 우리 집은 두 눈으로 살테니.” 바로 이겁니다.

혹 당신은 상사 때문에 외눈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사에서는 안대로 영의 눈을 가리고 주일에만 안대를 풀고 나오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돼지머리에 절을 하고, 접대를 핑계로 향락을 즐기는 외눈박이는 아닙니까? 세상 모든 것이 타협이 있을지라도 신앙만은 타협이 없습니다. 한 쪽 발은 세상에, 다른 한 발은 교회에 두는 자는 필경 가랑이가 찢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나 끝내 참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외눈박이끼리 살면 외눈박이 자식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유전법칙입니다. “넌 왜 맨날 그렇게 속을 썩이냐?”고 자식을 나무랄 것 없습니다. 외눈박이가 외눈박이 생활방식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까요. 당신이 외눈으로 사는데 자식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서양속담에 ‘아이들은 앞에서 안 배우고 뒤에서 배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아이들은 어른들이 행동하는 대로 보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면 아이들은 그러지 말래도 절로 그대로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방식대로 살면 아이들은 그것이 옳은 줄 알고 따라하게 됩니다. 닮은꼴은 시간과 정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태어날 때는 부모를 잘 만나야겠지요. 학교에서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자라면서 친구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는 주의 종을 잘 만나야 합니다. 주의 종이 외눈박이면 다 외눈박이가 되고, 주의 종이 소경이면 다 구덩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교회는 양극화가 되어 갈 것입니다. 영적인 교회냐, 문화적인 교회냐로 갈릴 것입니다.

문화적인 교회는 아주 멋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상식이 통하고 학문으로 정립된 것이 근사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21C목회는 1C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혀 기도하고, 전혀 찬송하는 교회가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단체의 흥망성쇠가 단체장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영적 가장이 바로 서면 그 가정은 절대 넘어지지 않습니다. 가장이 두 눈을 바로 뜨고 살면 자식이 절대 외눈으로 살지 않습니다. 설혹 세상으로 나갔다가도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등대가 계속 빛을 비추면 풍랑 속에서도 언젠가 배는 포구를 찾게 되듯이 말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 나라의 소망이 없다면 우린 얼마나 불쌍한 자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상입니다. 우리가 미련하게 보이고, 우리가 어리석게 보여도 이것이 옳은 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며 말합니다. “그렇게 답답하게 살지 말고 한 눈을 감아. 한 눈만 감으면 기가 막힌 세상이 있어.” 그러나 그 말에 현혹되어 넘어가 한 눈을 빼내면 병신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점 없고 흠 없는 자들의 것인데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닫히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아 갑니까? 그 길은 좁은 길이어서 영의 눈을 크게 떠야 보이는데 아예 감아버렸으니 어찌 찾아가겠습니까?

두 눈을 크게 뜨세요. 영의 눈을 바로 떠서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좇아가며 악한 마귀의 궤계를 진멸해야 합니다. 악한 것이 당신의 눈에 티끌을 불어넣어 눈이 감기게 할지 모릅니다. 세상의 화려함으로 당신의 눈이 멀게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여 하나님나라를 사모합시다. 눈은 사모하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양이 이끄는 사자 부대보다 사자가 이끄는 양의 부대가 낫다

적보다 무서운 것은 무능한 지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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