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있는 자는 지칠 줄 모른다 (히 12:1~17)
7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들은 대개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들어가 밑바닥 인생으로 갖은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남들이 다 퇴근하는 시간에도 그들은 숨어 야간수당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해도 피곤함을 몰랐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고국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편안하게 살 생각을 하면 그깟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고생하면 함께 모여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꿈으로 오히려 하루 24시간이 짧았던 것입니다.
가장 가난한 자가 누구입니까? 현실에 안주하며 꿈과 이상을 저버린 자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게 되어 있고, 야망이 없는 청년은 이미 늙은 것입니다. 청춘이란 20대 청년을 지칭하는 국한된 말이 아닙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청춘이란 꿈을 향해 도전하는 의욕에 찬 사람을 말합니다. 종종 20대 노인을 봅니다. ‘될 때로 되라’며 자기 인생의 방관자로 사는 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꿈이 없으면 이미 죽은 삶입니다. 꿈이란 오늘을 사는 산소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소없이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꿈은 있는 자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노릇을 하지 않나, 좀 살만 하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모함해서 감옥에 들어가질 않나, 참으로 험산준령을 넘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슴에 꿈나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어떤 것도 그의 꿈나무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곡식 단들이 자기 단을 향하여 절하던 꿈과, 해와 달, 그리고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던 꿈을 마음 판에 새겨두고 늘 거기에 물과 거름을 주며 그것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그 꿈이 없었다면 요셉은 어쩌면 보디발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로 안락을 취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평생 가슴에 화를 담고 분노와 복수의 칼을 갈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늘 보이지 않는 꿈을 그리며 살았기에 늘 정직했고, 언제나 충실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약관의 나이에 영광의 자리에 앉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꿈’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현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은 곧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꿈이 있는 자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곧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요즘 후보들은 매우 바쁩니다. 아마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지역구를 동분서주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절대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꿈은 삶의 지지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를 걱정해주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제발 좀 쉬엄쉬엄 하라’고 합니다. 장거리를 단거리처럼 뛰다가는 큰 일 난다고 걱정들이 태산입니다. 다들 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피곤치 않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국은 물론이요, 전세계를 죄와 악으로부터 대탈출시켜 예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던 모세의 심정이랄까요? 모세가 피곤함을 모르고 80에 40의 건강을 누린 것처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꿈이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에게 꿈이 없을 때는 어린 아이 앞에서도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할 만큼 겁쟁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영원한 소망이 잉태되자 십자가에 “거꾸로 죽겠노라” 큰소리치지 않았습니까? 꿈이란 사람을 이렇듯 180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심마니가 뱀을 두려워하는 것을 봤습니까? 축구선수가 태클이 무서워 질주하지 못하는 것을 봤습니까? 우리 교회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일의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의 왕권을 바라보는 믿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꿈이 있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 분이 십자가에서 갖은 모욕과 수욕을 참아내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죄와 악으로부터 구원하사 영원한 생명을 주며 행복과 자유를 만끽케 하려는 그 분의 꿈이 있었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자기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픈 꿈이 부모로 하여금 행상을 해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세일즈맨이 거절을 당해도 웃을 수 있는 이유가 그 세계의 최고가 되겠다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은 마치 필드에서 펼치는 골프경기와 같아 보입니다. 1홀에서 18홀까지 차근차근 밟아가는 꿈을 향한 인생의 행로 말입니다. 1홀에서 잘못했다고 좌절하면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가다보면 공이 연못에 빠질 수도 있고, 언덕 위로 훌쩍 날아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박세리 선수는 어떻게 했습니까? 양말을 벗고 물 속에 들어가 공을 쳐내지 않았습니까? 우승에 대한 꿈이 있기에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꿈에는 이처럼 의욕을 창출하는 힘이 있습니다. 현실이 암담하다고 주저앉아 있습니까? 가만히 당신의 가슴 속을 들여다보십시오.
그 안에 숨쉬고 있는 꿈나무를 바라다보면 벌떡 일어날 이유를 찾게 될 것입니다. 앞에 보이는 힘들고 어려운 현실은 허상입니다. 실상은 가장 좋은 것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제 겨우 7번 홀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직도 역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데 말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곧을 길로 가는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이며, 다리에 힘을 주는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탓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인생을 도적질하는 자는 당신 자신입니다. 꿈을 사장시키고, 소망을 꺾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 인생의 도적인 것입니다.
큰 그릇은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큰 꿈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거목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그릇이라도 엎어놓으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꿈, 이것은 결국 망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치 않는 꿈은 그리다 구겨진 도화지입니다. 내 의지, 내 노력으로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함께 해야 꿈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에게 꿈을 심어 주십시오. 과외를 열군데 뛰는 것보다 훨씬 멋진 아이로 자랄 것입니다. 아내에게 꿈을 주는 남편이 되세요. 남편에게 ‘당신은 우리 집안의 꿈이야’ 하고 소망을 주세요. 그러면 세상에서 당당해질 겁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가르친다면 부흥은 절로 될 것입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꿈과 이상은 크게 현실은 냉철하고 확실하게
미완성을 보고 평하지 말라 완성품을 보고 논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