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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깨닫는 것이 복이다

1352호 · 2026-04-05
To Be Succeeded

깨닫는 것이 복이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 불량식품은 몸에 좋지 않으니 군것질하지 마세요.” 선생님의 한마디가 마음에 박혔던 나는 그날로 군것질을 끊었다. 작은 사건이었지만, 가르침이나 충고, 조언이 깨달아지고 심비에 박히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경험이었다.

사람의 말도 이렇게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야 어떠할까? 성경에는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결말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죽인 범죄자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남았지만, 사무엘의 책망에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했던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첫닭 우는 소리에 깨달아 통곡하고 회개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기까지 주님의 충성된 수제자로 살았던 반면, 가룟 유다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끝내 예수님을 팔아 비참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행 때 함께 나섰지만, 중도에 포기했던 마가. 그는 이후 깨닫고 변화되어 베드로에게 꼭 필요한 선교 동역자가 되어 우리가 즐겨 읽는 마가복음과 베드로전후서를 대필하기까지 귀한 일꾼이 되었지만, 한때는 주님의 일꾼이었으나 세상을 사랑했던 데마는 끝내 주님과 사도 바울을 떠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저버리고 말았다(딤후4:10).

그뿐인가! 고귀한 왕비의 신분이었음에도 사촌 모르드개의 말 한마디에 깨달아 3일 금식을 결단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며 왕 앞에 나아가 전 유다를 구원한 에스더, 또 한 나라의 이름있는 장군이었지만 작은 여종의 말 한마디에 깨닫고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담가 고질적인 문둥병을 고침 받은 나아만 장군, 이들의 간증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력이 있으며, 또한 그 말을 듣고 깨달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반드시 전대미문의 축복의 주인공이 됨을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깨닫는 것이 복이다. 깨달을 때 구원의 역사와 치료가 일어나고, 깨달아야 변화와 성장이 시작된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119:34).

이국진 사모

소망의 언덕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

“아빠! 애들끼리 싸우고 난리 났어! 아빠가 빨리 와서 해결 좀 해줘!”

교육관으로 향하던 길, 문득 아이들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자 딸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평소라면 “너희끼리 잘 해결하렴. 기도회 다녀와서 이야기하자.”라고 달랬을 텐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마음이 강하게 움직여서, 저는 올림픽대로에 진입하기 직전 핸들을 돌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아이들은 여럿 있었지만, 막내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막내는 어디 있니?”라고 물으니 막내아들이 소리를 지르며 어디론가 뛰어갔다고만 했습니다. 놀란 마음으로 아이들을 차에 태워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들을 먼저 내려준 뒤, 차를 돌려 다시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우지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차체가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차량을 들이받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려서 확인하니, 운전자 쪽 바퀴가 아예 빠져버린 것입니다. 20년 넘게 운전하며 늘 차량 점검을 철저히 해왔던 터라, 바퀴가 흔들리는 전조 증상조차 없이 통째로 빠져버린 이 사건 앞에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당혹감은 이내 깊은 전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만약 제가 딸아이의 간곡한 전화를 외면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대로 올림픽대로에 올라 시속 80km가 넘는 속도로 달렸다면요?

하나님은 딸아이를 통해 제 발걸음을 돌리게 하셨고, 안전한 장소인 아파트 단지 안 서행 구간에서 저를 멈춰 세우셨습니다. 사역지로 향하던 저의 급한 마음보다, 당신 자녀의 생명을 더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이었던 것입니다. 남매들과의 다툼으로 화가 나서 학원을 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확인하고, 사고도 수습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때, 제 입술에는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때론 눈에 보이게, 때론 보이지 않게 저의 출입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계획이 틀어지고 예기치 못한 소란함이 찾아올 때, 그것은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가장 긴급한 손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삶을 붙드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현승 목사

신앙에세이

우리의 시간대는 다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갈등은 보통 이해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내 생각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상대방이 이해되지 않을 때다. 그러한 갈등은 한 사람이 자신의 뜻을 접고 상대의 뜻에 따르거나, 상대의 생각을 완전히 포용하거나, 아니면 서로를 온전히 이해했을 때 해소된다.

세상 말로 중2병이란 단어가 있다. 중학교 2학년 전후 사춘기 시기에 나타나는 과한 자의식, 과장된 자아 표현을 뜻하는 말로, 허세나 무개념처럼 보이지만 정체성 탐색과 감정 기복이 큰 자연스러운 발달 양상으로 설명된다고 한다.

마침, 내게도 중학교 2학년 자식이 있다. 대화하다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논리로 내 인내의 한계를 시험할 때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게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고, 내 주관이 옳다고만 생각하는 시기가 지금까지도 종종 있어 왔다는 것을 늘 나중에야 깨닫는다. 아마 내 아버지도 나와의 대화에서 그러한 것을 느끼실 테지만, 지금의 나로서도 단지 아버지가 날 이해하지 못하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엔 우리의 시간대가 다르다. 다 같은 시간대를 거쳐 가지만, 다 같이 동일한 시간대에 있진 않다.

말과 행동 양식, 인격과 가치관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과 믿음의 성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새 생명에서, 연약한 믿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에 이르기까지 영적인 시간대도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판단이 아닌,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내가 항상 옳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시간대는 영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매 순간 우리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신다. 우리의 시간대가 언제이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박찬영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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