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나를 항상 곁에 두고 싶어하신다(신8:11~19)
우리 어머니는 제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워낙 바쁘다보니 자주 시간을 내지 못했지만, 어쩌다 어머니께 가면 베개를 내놓으며 “피곤하지? 여기 누워라.” 하시며 제 옆에 바싹 다가앉아 그간 밀린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제가 뭘 사다드려서 좋으신 것이 아니라 그냥 아들이 옆에 있는 것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다 약속이 있어 “어머니, 저 이만 갈게요.” 하면 “벌써 가게?” 하시며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이 옆에 있는 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아버지이신지라 딱 이 마음이십니다. 우리를 곁에 두고 싶어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8~9).
하나님이 에녹을 기뻐하신 이유가 이것 아닙니까(히11:5)? 에녹이 뭐 대단한 일을 해서 하나님이 기쁘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니 하나님이 에녹 때문에 기쁘셨고, 계속 동행하다보니 아예 이 땅을 벗어나 천국까지 이른 것입니다(창5:24).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첫 사람인 아담을 창조하시고, 날이 서늘해지면 아담을 찾아가 그와 거닐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이끌어내신 것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9:46).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예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하신 것도 그 때문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12제자를 택하신 이유도 그들과 함께 있기 원해서였습니다(막3:14). 그리고 하나님은 장차 하늘에서까지 우리를 영원히 곁에 두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21:3).
너무 소박한 소원이지 않습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 이 우주 삼라만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시라니….
그런데 이 소박한 하나님의 소원을 인간들이 무참하게 깨버렸습니다. 아담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났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에게는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신8:14). ‘또 떠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12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6:67) 하셨겠습니까.
자고로 사람들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가 봅니다. 위급하면 하나님을 찾다가 하나님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고,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얻은 그것을 들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신8:12~13) 하나님 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병들었을 때나 사업이 어렵고,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는 성전 맨 앞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도하고 찬송하고 봉사하던 자들이 나음을 입고, 문제가 해결되고, 좀 살만하고 배부르면 슬슬 뒷전으로 물러나다가 어느 순간에는 안 보이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뭐 다른 교회에 가서라도 신앙생활을 잘하면 그나마 괜찮지만, 아예 하나님을 떠났을까봐 안타깝습니다. 누가 준 건데, 누가 치료해줬는데 정작 주신 분을 멀리하고, 주신 것만 가지고 떠나다니요.
욥이 왜 위대한지 압니까? 욥은 복을 받았을 때나 복이 떠나고 고난 중에 있을 때나 한곁같이 하나님 곁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마귀란 놈이 하나님 앞에서 욥에 대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1:9)라고 참소했습니다. 하나님께 ‘욥에 대해 자랑하지 마세요. 그가 괜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압니까? 하나님이 부귀영화를 주시니 그런 겁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귀에게 정말 그런지 시험해보라고 해서 그것을 다 빼앗아봤는데도 그는 여전히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라며 하나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우리가 바로 욥과 같아야 합니다. 주신 것 때문에, 주실 것 때문에 하나님 곁에 알짱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요, 나의 주’이시기 때문에 상황 여하,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그분과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의 목적이요, 내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런데 마귀란 놈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고, 갈라놓고 싶어 안달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쐐기를 박습니다. 아무리 두꺼운 장작도 쐐기를 박고 내리치면 갈라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 쐐기는 돈일 수 있고, 명예일 수 있고, 이성이나 고난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내리칠 때 쫙 빠개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나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쐐기는 안 박혔나 늘 살피고, 혹 박혔으면 즉시 빼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신가,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신가’ 하고 나를 살펴야 합니다.
가끔 고3 학생의 부모들이 상담을 요청합니다. “아이가 고3인데, 학원이 주일에도 계속되는데 빠지면 못 따라가니까, 일 년만 주일에 학원 다니면 안 되나요? 대학 붙으면 열심히 할 거예요.”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일 년 후에 대학 붙으면 정말 그 자녀가 교회에 잘 다닐까요? 아니요, 한 번 멀어지면 다시 돌아오기는 정말 힘듭니다. 성경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1:2)고 말씀했지요? 왜 ‘영혼 잘 됨’이 먼저 일까요? 범사에 먼저 잘 되면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잘 되면요? 어디 좋은 대학 가는 것뿐이겠습니까? 범사에 다 잘 됩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아놓는 것들을 일체 배설물로 여겨 버린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여러분,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최고의 복입니다(시73:28). 왜냐?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하시기 때문입니다(약4:8). 하나님이 나와 가까이하시면 영·혼·육에 무슨 걱정이 있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부탁하건대, 부디 하나님을 근심시키지 말고, 늘 하나님이 바라보실 수 있도록 항상 하나님 곁에 거하십시오. 그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할렐루야!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것인가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자가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