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에 하신 예수님의 유언적 설교(마21:1~17)
과로로 인해 몸이 안 좋아 기도원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문득 ‘내가 떠나면 우리 성도들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갈까?’라는 생각이 뇌를 스쳤습니다. 그래서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길 말은 단 하나, ‘기도의 부족은 모든 것의 부족이다.’라고 결정했습니다. 기도하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니 이 세상을 사는데 족할 뿐 아니라 천국까지 무사히 안착하여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래서 그 문구를 기도원 벽에 새겼지요. 제가 없더라도 우리 성도들이 꼭 이것만은 지켰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요.
저는 제가 없는 세상을 가정하여 유언적 문구를 만들었음에도 굳은 마음, 간절한 마음이었는데, 죽은 날을 받아놓고, 죽을 장소를 찾아가시는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유언적 설교를 하셨을까요? 성경 여러 곳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을
‘민망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부끄럽다’의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는 뜻입니다. 이미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하나님의 뜻을 받잡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에게 앞으로 당할 고초나 육신적 고통은 염두에 없었습니다. 다만 남겨두고 가는 당신의 제자들과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더욱 민망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 민망한 마음으로 예수님은 유언적 설교를 하십니다. 그 설교는 크게 3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그 첫째는 ‘외식하지 말라’, 둘째는 ‘종말을 대비하고, 재림을 준비하라’, 셋째는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앞의 두 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외식하지 말라’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있는 마리아의 집에 머무시다가 예루살렘에 오셔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성전은 시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더럽혀져 있었습니다. 성전은 환전소였고, 제물을 파는 장사터였습니다.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멀리서 오는 백성을 위한 것’이라며 묵인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거기서 이익까지 챙기고 있으니 예수님의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요. 예수님은 그들을 다 내어쫓고 교회를 정화하셨습니다.
사실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에 대해 예수님은 하실 말씀이 참 많았습니다. 다만 때가 아닌지라 꾹 참고 잘 표출하지 않으셨는데, 마지막 때가 되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맹렬히 질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이는 ‘회개하지 않으면 불행과 심판이 닥친다’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종교지도자를 비롯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장 큰 죄는 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외식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가면을 쓴 것처럼 겉모습은 경건하나 속은 진리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짓, 위선으로 가득 찬 거죠.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마23:5). 그들은 기도도 거리와 큰 거리에서 했고(마6:5), 의와 인과 신이 없는 형식적인 십일조를 드리는 등(마23:23) 사람 앞에서만 경건한 척, 거룩한 척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드러나는 법(딤전5:24~25),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28).
그런데 이 말씀이 어찌 종교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이겠습니까? 지금도 외식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그렇게 될까 염려하시어 구제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히 하고(마6:3~4), 기도도 골방에 들어가서 하고(마6:6), 금식도 표나지 않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마6:16).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순간, 거짓과 위선을 떨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도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까마득한 후배인 바울에게 질책당한 일이 있습니다. 율법에는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부정하다고 했는데,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과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몇몇 유대인들이 오자 식사를 파하며 마치 유대 율법을 지킨 듯이 행동한 것입니다. 바나바마저도 그런 외식에 휘둘렸으니 바울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갈2:11~13).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땅을 팔아 그 돈의 일부를 숨기고 전부인 것처럼 베드로에게 가져왔다가 내외가 죽임을 당한 것도(행5),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으니 이것을 본 가룟 유다가 ‘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느냐’고 역정을 낸 것도 다 사람을 의식한 외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시선을 살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 나에게 정직하고, 남에게 진실되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고 분명하면 사람 앞에서건, 하나님 앞에서건 떳떳하고 당당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적 설교 두 번째는 종말을 대비하고,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종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5가지 비유로 종말을 대비하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보고 시기를 분간하고, 충성된 종처럼 늘 깨어 예비하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넉넉히 준비하고,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복지부동하지 말고 부지런함으로 이익을 남기고, 지극히 작은 일도 베풀고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이 5가지 비유 말씀의 공통분모는 ‘깨어서 넉넉히 준비하라’입니다. 대강, 적당히 준비하는 것은 준비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씀입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목사가 몇 월 며칠에 주님이 재림한다고 하니까 그 말을 믿은 사람들이 직장도, 가정도 폐하며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치고 난리를 치지 않았습니까? 그날 오신다고 확신했기에 넉넉히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다 바칠 정도였던 것이죠.
사실 우리가 대충 준비하는 것은 언제 오실지 막연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재림을 이렇게 해석해봤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예수님 재림의 날이라고요. 죽으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거든요. 바울도, 베드로도 이미 주님을 만났잖아요. 꼭 천사장의 나팔과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해도 죽으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 그날이 곧 종말이요, 재림의 날이지요. 문제는 내가 죽는 날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지금 깨어서 철저히, 넉넉히 재림의 날을 대비하고 준비해야 하는 겁니다.
명심할 것은 세상에서 이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신앙이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모세는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신30:19~20)고 유언을 남겼고, 여호수아도, 다윗도, 솔로몬도, 베드로도, 사도 요한도 그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유언의 공통점은 남은 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유언이야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초등학교 때 청개구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 안 듣던 청개구리도 엄마의 유언만은 들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의 유언대로 살아봅시다. 장담컨대 그날 예수님이 ‘잘했다’ 하고 안아주실 것이고,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라”(고전15:58). 할렐루야!
부모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을 비추는 밝은 빛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