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은 인간미다(마7:12)
인간미(人間味)란 말 그대로 인간의 맛을 말합니다. 음식이 맛있어야 먹듯 사람도 맛이 있어야 가까이 하게 됩니다. 따뜻한 정, 사랑, 용서가 있을 때 사람 맛이 나는 법이지요. 그런데 요즘 인간미는 사라지고 냉정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나만 잘 살고, 나만 아니면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지요. 하긴 놀랄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세는 그런 세상이 된다고 미리 말씀하셨으니까요(딤후3:1~5).
그러나 세상이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람마저 그러면 안 되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산상수훈 중에 하신 말씀으로, ‘황금률’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말씀이며, ‘율법과 선지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율법과 선지자’라고 언급된 곳이 한 군데 더 있는데, 마태복음 22장입니다. 어느 한 율법사가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크냐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하셨습니다. 곧 ‘율법과 선지자’라는 뜻은 구약과 신약으로, 즉 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하나님이요, 수평적인 관계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면 대접하게 되어 있거든요.
사람은 독불장군처럼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상대적인지라 어떻게 대접받느냐에 따라 상응한 대접을 한다는 것이죠. 산에 올라가 ‘야호’하고 소리를 지르면 ‘야호 야호 야호’ 하고 같은 말이 반복되어 돌아오듯, 내가 상대를 잘 대접하면 대접이 흔들어 눌러 넘치게 온다는 겁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눅6:38). 오죽하면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10:32~33)고 하셨을까요?
대부분이 대접하라고 하면 남을 대접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사실 내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모든 기점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어야 남을 대접하지요. 내가 건강해야 남을 대접하고, 내가 알아야 남도 도와줄 수 있거든요. 이타주의를 위한 이기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고 하셨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고 ‘예루살렘’을 먼저 언급하심은 기점이 ‘나’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까요? 내 영·혼·육을 잘 먹이고 잘 관리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영을 먹이고, 문화적인 지식으로 혼을 만족케 하며, 몸에 이로운 음식과 운동과 환경으로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이 나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인색한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내가 없는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나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젊은이들에게 “지금은 저축할 때가 아니라 너 자신에게 투자할 시기다.”라고 강조합니다. 예전에 어느 여자 권사님이 병이 깊어 찾아왔길래 기도원에 가서 푹 쉬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제가 기도원에 가면 애들이랑 남편 밥은 누가 해줘요?” 하면서 기도원 가기를 마다했습니다. 결국 그분은 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게 현명한 처신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있어야 가족이 있는 것이고, 내가 있어야 사회도, 국가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나와 제일 가까운 사람을 잘 대접해야 합니다. 제일 가까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내 가족이요, 내 구역식구요, 내 성도요, 내 이웃이요, 내 직장동료요, 친구입니다. 솔직히 그들은 너무 가까워서 소홀하기 쉬운 상대지요. 그런데 이걸 아십니까? 그들이 나의 나팔수요, 광고매체임을 말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를 모르던 사람이 나를 알게 됩니다. “저 사람은 신뢰할 만해.”라든지 “저 사람은 가까이하면 못 써.”라든지 하는 평가가 내 가까운 사람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을 대접해야 할까요?
저는 ‘가마 탄 사람은 가마꾼을 생각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자기 수족처럼 일하는 사람을 대접은커녕 무시한다면 가마꾼이 가마를 엎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직원이나 하청업체나 협력업체에 갑질을 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교단의 어느 장로는 하청업체에 원가를 무조건 깎고 체불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더니 결국 그들의 파업으로 인해 회사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인천교회의 한 장로는 하청업체 사장들이 와서 밥을 산다고 오면 ‘여러분들 덕에 내가 돈을 번다.’며 자기가 꼭 밥값을 낸다고 합니다.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장로의 기업이 잘 될 수밖에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개척할 때 교회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과자도 사주고, 코도 닦아주고 그랬습니다. 이 일을 자주하다 보니 아이들이 집에 들어가 엄마 아빠에게 “저 교회 목사님이 과자도 사주고 코도 닦아주고 손을 씻겨줬어.”라고 말했고, 그 엄마 아빠들이 감사하다며 교회에 나오게 되어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다고 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또 가까운 이웃 부동산에 있는 노인들을 잘 섬기니 사람들이 집을 사면 그분들이 “저 교회 나가봐라. 목사님이 아주 좋아.”라고 광고해줬다고 합니다.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찌니라”(잠27:2).
그런데 목사들이 자기 성도들에게 반말이나 하고 명령이나 한다면 그 목사를 누가 섬기겠습니까? 직장동료를 무시한다면 누가 가까이 지내려고 하겠습니까?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자식이 나를 싫어합니까? 그 사람을 탓할 게 아닙니다.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 살펴야 합니다. 개도 발로 차면 막 짖어대고 물려고 합디다. 우리 집 들어서는 골목에 큰 개가 하도 짖길래 ‘이놈!’ 하고 눈을 부릅뜨고 야단을 치니까 더 짖어댑디다. 내 발소리만 들려도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가 떠나가라 짖어댑디다. 그래서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집에서 고깃덩어리를 가져다 몇 번 던져줬더니 글쎄 나중에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지 뭡니까. 내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짖어대던 놈이 이제는 내 발소리에 벌써 마중을 나와 반깁디다. 대접하는 대로 대접받는 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 행위로 세상을 밝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 가까운 사람들을 소홀하게 대접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들이 우리 행위를 보고 “저 옆집 아저씨는 역시 달라.”, “예수중심교회 성도는 뭐가 달라도 달라.”, “우리 삼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김 과장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 같아.” 이래야 그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껴 ‘교회 가볼까?’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손 대접하고, 먼저 힘든 일을 하고…. 그러면 당신도 이해받고 사랑받고 용서받고, 대접받을 것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2). 할렐루야!
왕 대접을 받고 싶은가
상대를 왕처럼 대접하라
대접하는 대로
대접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