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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심정

1097호 · 2021-05-16
아름다운 인생

절박한 심정

얼마 전, 세계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배우가 있다. 바로 윤여정 배우다. 그녀는 결혼생활로 배우활동을 접었다가 이혼 후 두 아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다시 배우활동을 시작했고, 이혼녀라는 편견 속에서도 배역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지금은 연기를 인정받는 배우가 되었다. 그녀는 “두 아들이 나를 명배우로 만들었다.”고 오스카 시상식에서 말했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스스로 ‘생계형 배우’였다고 말한다.

목사님은 ‘헝그리정신’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다. 이 말은 주로 권투선수들에게 쓰이던 말로, 가진 게 건장한 몸 하나밖에 없던 젊은이들이 밑천이 들지 않는 권투로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정신이 있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운동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은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

필자는 그 세대를 겪지는 않았지만, 담당하고 있는 중고등부 학생들을 볼 때면 그런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다. 몸은 좋은데, 정신은 나약하기만 하다. 그들에게서 절박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환경이 좋아서 그런가?

누구든 절박하면 젖 먹은 힘까지 다하게 되고, 절박하면 쥐가 고양이에게 덤비는 것 같은 담력이 생긴다. 절박하면 길이 보이고, 절박하면 잠재되어 있던 능력이 발휘된다. 그리고 절박하면 부르짖어 기도하게 된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은 절박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선이 아닌 최선을 다할 때 내 인생이 명작이 되고, 스타가 된다는 것을 알자. 윤여정 배우처럼.

이은성

es2563@naver.com

신앙논객

야, 너두 할 수 있어!

“야, 너두 할 수 있어!” 영어회화 업계에 후발주자로 뛰어든 한 회사의 광고 카피인 이 문장은 기존 1위 업체를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서게 하는 핵심 요인이 되었다. 이 회사는 기업의 목표를 단순히 회원 수나 콘텐츠를 늘리는 것이 아닌 ‘학습자(수강생)의 성공’으로 잡았다. 이 광고를 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할 수 있다’는 인식을 계속 심어주었고, 심지어 후발 광고에는 배우 자신도 열심히 공부하여 영어 실력이 향상된 것을 보여줌으로써 ‘나도 노력하면 저렇게 바뀔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이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대학부에는 20대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청년들이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성령을 받고 완전히 변화되어 주의 일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고 인정받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봉사는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와 부서의 모든 예배와 모임에 개근하는 사람도 있고, 주일예배는 매주 참석하지만 말 그대로 출석체크 하듯이 마당만 밟고 가는 사람도 있다. 각자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알지만, 모두가 하루라도 속히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요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길 바라는 건 목회자라면 당연히 품게 되는 마음일 것이다.

그중 한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은 오래 했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해서 ‘나도 성령을 받고 변화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친구를 놓고 기도하는데 문득 하나님께서 저 광고 카피를 떠올리게 하셨다. “야, 너두 변화될 수 있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며 핍박하던 죄인 중의 괴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되어 사도 바울이 되었고, 방배동 일대에서 부족함 없이 살던 한 부자 청년이 하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어 예수의 종, 사도 이초석 목사가 되었다. He can do it. She can do it. Why not me?

성공은 매사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의 것이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니까. 당신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잘 붙어 있으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요, 성령의 사람이 될 것이다. “야, 너두 할 수 있어!”

신혁주 전도사

blessedmic@naver.com

오늘의 메시지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셨다. 인간의 삶을 사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저귀를 안 갈았을까. 배고파 우는 모습, 목수의 아들로 못질을 못하거나 대패질을 서투르게 하는 모습을 보았을 터이다. 그 아는 자가 메시아? 코웃음을 쳤겠지. 그래서 나사렛 사람들은 불행하다.

방배동 출신 중에 목사님 성도가 있을까? 제자는 더욱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내가 목사님을 알게 된 방배동에서부터 지금까지 50년 세월을 아주 조금씩 늦되게 목사님을 알아가는 중이다. 예수님의 엄청난 역사를 보면서도 감동받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이해하게 된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어느 날 문산교회 이전하는 곳에 리모델링공사에 가서 일하라고 명하셨다. 아침에 카톡으로 말씀하시고 오늘 중으로 가라 하신다.

문산교회 인테리어 공사하는 곳에는 박인덕 목사님을 비롯하여 참 여러 지교회 목사님들이 노가다 현장을 뛰신다. 강화, 동두천, 용인 등 10군데 이상 목사님들이 현장봉사를 하신다. 강도 높은 노동 후에도 저녁 기도는 두 시간 이상씩 강행한다. 참 대단하다는 말이 부족하다.

대구교회 청년부에서 16년간 장순천 목사님을 의지하고 순종한 청년이 나를 바래다주었다. 편도 40km 거리니 늦은 밤 걱정이 됐다. 그 청년 하는 말이

‘이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한다. 그러면서 간증을 하는데 정말 대단하다. 그 16년 동안 담임목사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한 결과를 간증하였다.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확실한 믿음, 체험이었다. 장 목사님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한 친구의 간증은 놀라웠다. “장 목사님은 저희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이초석 목사님을 앞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존경합니다. 그렇게 교육받았습니다.” 이 청년의 결론이 이렇다. “장 목사님이 저희를 키우셨지만, 이초석 목사님을 떠나면 그 순간 저는 장 목사님을 떠납니다. 우린 이초석 목사님의 제자입니다.” 하. 멋진 담임목사 밑에 성도구나.

대단한 문산교회, 성도! 모두가 총회장 목사님을 필두로 하는 귀한 믿음이다. 나는 부끄럽고 배우며 오직 한 마디 감탄, ‘대단합니다!’ 외치는데, 사실은 훨씬 그 이상입니다.

이광주 목사

한라에 핀 샤론의 꽃

사랑이 아닌 공경의 대상 ‘부모’

우리는 고령화시대를 살고 있다. 머지않아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화사회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부양받아야 할 사람은 늘어나고 상대적으로 부양할 사람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부모를 버린 자식’이라는 현대판 고려장의 뉴스 기사를 접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한국복지패널 분석 결과(보건사회연구원, 2019), ‘부모를 모실 책임은 전적으로 자식에게 있다’는 의견에 대해 ‘반대’ 응답이 40.9%로 나타났다. 한편,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35.7%였다.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부모부양에 대한 마음과 인식이 급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십계명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중 하나님에 대한 핵심 되는 계명은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이고, 사람에 대한 핵심 되는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5계명에 대해서는 평범하게, 그리고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굳이 십계명이 아니어도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고 어디서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제시한 결과를 생각하면 우리는 제5계명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이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십계명에‘자식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없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만 있을까? 사실 자식을 사랑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 같지 않다. 그냥 사랑 하나면 된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데 있어 조건을 내걸지 않고 사랑한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에 대한 계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인간에 대한 계명의 출발점으로 주신 것이 아닐까 싶다.

「공경」에 대한 의미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공손히 섬김(신5:16), 상대방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예의를 갖춤(막7:10),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자세를 말하는데, 두려움을 수반한 공포심으로가 아니라 존경과 흠모의 심정으로 섬기는 자세’를 뜻한다(레26:2). 즉 상대방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부모를 사랑하라 하지 않고 공경하라고 하셨다. 성경 여러 곳에서 ‘사랑하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도 ‘부모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없다. 이는 부모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공경과 경외(레19:3)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듯이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잘 될 수 없고, 장수하지 못한다(출28:12). 그만큼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강조하지 않으면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기에 하나님과 부모를 동등한 위치에 두시고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고, 반대로 부모님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듯 하나님의 가치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윤리적 문제를 떠나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고 반역이 아닐까 싶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사회학자 클린턴 가드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가정이 있으면 아직 다 잃은 것이 아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져도 가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다. 그리고 성경엔 단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 부모를 공경하는데 어떠한 조건도 내세우지 않았다. 부모는 생명의 근원이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실재하는 육신의 몸으로 생명을 전달해주신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모두가 장수의 축복과 이 세상에서 잘 되는 축복을 누리기를 바라고, 한 사람도 자녀에게 경홀히 여김을 받는 부모가 없기를 바라며, 한 사람도 부모님을 경히 여기는 사람이 없기를 소망한다.

Dr. 권정미

갈등 해소법

갈등 해소법

30여 개가 넘는 점포가 있는 상가로 이사를 들어가면서 나는 텃세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음식 냄새가 난다고 해서 모든 문을 닫고 장사를 해야 했고, 시야를 답답하게 한다며 유리 썬팅 시공을 못하게 해서 실내를 모두 노출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인사를 받지 않는 몇몇 터줏대감들이 주는 심한 모멸감이었다. 더욱이 바로 옆집인 미용실에서는 늘 삼삼오오 모여 우리 가게를 슬쩍슬쩍 훔쳐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억지에 가까운 텃세에도 교회 다닌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에 꿋꿋했고, 인사도 밝게 하면서 나름 갈등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이같은 노력에도 계속되는 간섭에 미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주는 모멸감보다 내 안에 싹트는 미움을 제어하지 못해 자괴감에 빠졌다. 그래서 울컥 슬픔이 복받쳐 올라오면 기도 반, 하소연 반 주님을 목청껏 불렀다.

그럴 무렵, 너무나 손쉽게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옆집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하였는데, 놀랍게도 이후 그들이 배달통을 들어다 주기도 하며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감격한 나는 온 가족을 대동하고 미용실 단골이 되어주었고, 이 깨달음으로 주변 상가를 상대로 구매를 하며 화평을 일구는데 만전을 기했다.

혹시 누군가와 갈등을 겪고 있다면 작지만 잦은 상거래를 해보자. 얼마 전에 이시대 목사님이 ‘화목하려면 제물이 필요하다.’라고 설교하셨는데, 그 말씀이 정말 맞다. 그들의 필요 욕구를 챙기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니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아군이 되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힘든 관계나 갈등과 단절의 관계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라. 그리고 화목제물을 그들에게 줘라. 얽힌 실타래가 풀리는 기쁨을 맛보리라.

추성숙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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