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은 익을수록 향이 좋다(창4:6~8)
여러분, 공든 탑은 안 무너집니까? 아닙니다. 공든 탑도 무너집니다. 계속 공들이지 않으면 무너집디다. 가정이란 탑은 더욱 그렇습니다. 계속 공들이지 않으면 순간 무너집디다. 목회 36년에 접어들었으니 오죽 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중 대다수가 가정에 대한 것이고, 그중의 상당수가 부부가 싸워서 상담하러 온 경우였습니다.
저는 부부 일에는 잘 관여하지 않지만, 성경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곤 합니다. 특히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12:25)는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자고로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주 싸우면 가정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싸우는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분노’입니다. 정말 어떤 사람은 투견처럼 사사건건 화를 냅니다. 아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남편이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버럭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이요,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하고 살자면 정말 힘이 들겠지요. 그런 사람에게 들려주고픈 찬양시가 있습니다.
‘오 모래여, 오 모래여, 내 사랑 모래여/ 나만이 아는 당신의 희생의 사랑에 할 말을 잊었다오/ 이것이 파도의 고백이라오/ 당신은 모래, 나는 파도/ 당신은 배요, 나는 노라오/ 우리는 예수가 맺어주신 영원한 천생연분이라오/ 오 사랑, 오 사랑, 우리는 사랑뿐이라오/ 지치고 상한 맘 안식이 있다면 오직 당신의 품이라오/ 영원히 당신만을, 당신만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모래와 파도’라는 제가 작시한 곡인데요. 이 곡을 작시한 계기는 이렇습니다. 목회 초기,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마음도 식힐 겸 혼자 제주도에 갔습니다. 제주 바닷가에서 상념에 잠겨있는데, 거센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위에 부딪치니 파도가 자지러지게 소리를 내고 아파하며 물러가고, 받아친 바위도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반면에 눈을 돌려 모래사장을 보니 같은 세찬 파도가 몰려와도 모래는 그것을 다 안아 잠재우고 물방울을 만들며 방글방글 웃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으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아~노를 되받아치지 않는 지혜, 그걸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쪽이 화가 나걸랑 잠시 피하든지, 그냥 그때는 조용히 보듬어야 큰 싸움이 안 납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빼앗겨 노가 가득하자 그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외갓집으로 피신시켰듯이 말입니다. 성경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15:1)고 말씀하심으로 거센 파도에는 모래 같은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럼요, 한쪽이 화가 나면 다른 쪽은 참아야 합니다. 되받아치면 대형사고가 납니다. 손바닥이 마주치니까 소리가 나는 것이지, 한 손이 피해보세요. 절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한쪽이 참고만 살아야 하느냐? 그건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을 치유해야 합니다. 화를 내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 분노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보면서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살다 보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화를 참지 못해서 집에 불을 지르지 않나, 가족을 살해하지 않나, 무고한 자를 표적 삼아 해코지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누가 화 잘 내는 사람과 살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그와 친구가 되려고 하겠으며, 누가 그의 그늘에 있기를 원하겠습니까?
최초의 살인자로 기록된 가인을 볼까요? 왜 가인이 저주받은 인물이 되었습니까? 노를 다스리지 못해서입니다.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자 화가 나서 동생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창4:5~8). 그의 결국은 어찌 되었습니까? 간신히 생명표를 얻어 목숨은 건졌으나 평생 되는 꼴이 없이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창4:11~12).
가인처럼 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자에게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터이므로 내 칼을 집에서 빼어 무릇 혈기 있는 자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집에서 빼어낸 줄을 알찌라 칼이 다시 꽂혀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겔21:4~5). 혈기 있는 자를 칼로 치고, 그 칼이 다시 꽂히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혈기를 내는 자는 다 죽인다는 말씀이니 얼마나 두렵습니까? 또한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잠25:28)고도 하셨습니다.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으니 도적이 날뛰고 외적이 침입할 것 아닙니까?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는 창수와 같다고도 하셨습니다(잠27:4). 홍수가 나면 그간 애써 가꿔놓은 집이고, 가축이고, 사람까지 다 쓸어가듯, 분노로 인해 순간 다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분을 내시겠습니까? 오죽하면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잠22:24~25)고 하셨을까요?
성격이 콜라 같은 분들, 그 성격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생수와 같아집니다. 제가 그 샘플입니다. 저도 총 나간다 칼 나간다 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나니까 그 성격이 변합디다. 한 마디로 온유해졌습니다. 살인자 모세가 천하의 온유한 자가 되었듯이, 혈기 왕성했던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었듯이, 기타 줄처럼 파르르했던 베드로가 온유한 자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성령은 온유와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갈5:22~23).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맺힌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성품, 신성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하신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도 하셨고(마5:5), 또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시37:11)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계셨고,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자들 앞에서조차 맞받아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히12:2). 그래서 결국 승리하셨고,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온유’란 따스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입니다. 양지에 꽃이 먼저 피고, 따스한 곳에 사람이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들도 성도들을 대할 때 온유함으로 대해야 하고, 권면할 때도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딤후2:24~25). 또한 아내들도 그 행위를 보고 안 믿는 남편이 ‘나도 우리 마누라 믿는 예수를 믿어볼까?’라고 할 수 있게끔 온유함으로 가정을 이끌어야 합니다(벧전3:1~4). 그리고 혹시 분이 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는 서로 화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틈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엡4:26~27).
내 인생은 내가 쓰는 자서전입니다. 분노로 인해 평생 일궈놓은 모든 것을 창수로 싹 쓸어버리느냐, 아니면 온유하여 하나님이 주신 땅을 기업으로 받느냐, 그것은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있습니다(잠4:23). 괜히 화내서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온유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주인공이 됩시다.
참고로 과일은 익을수록 향이 좋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숙성된 인격,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봅시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1:20~21).
할렐루야!
천하를 다스리기 전에
나를 다스리는 자가 돼라
쉬이 분을 내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