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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흐르는 사랑

1029호 · 2019-11-17
세상을 보는 창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가슴으로 깨닫기가 쉽지 않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약 30cm인데 어떤 사람에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동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은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사랑이다. 낮은 곳, 즉 약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가 아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표현했다. 사랑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그 이유는 고아와 과부를 약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레위기 19장 14절을 통하여 하나님은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도,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왜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왕궁 같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들과 같이 낮은 곳에 있다. 낮은 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머물렀고 넘치는 사랑이 흘렀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고통 받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께 흥정을 잘해서 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절한 기도였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간절함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불평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은 고난의 낮은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마음이 높고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일 수가 없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고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난은 유익이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훈련이 된다. 재난이 닥칠 때 욥은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고 찬양하였다. 어떻게 자식을 잃고 재물을 다 잃었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을까? 욥은 고난의 자리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이정금 전도사

오늘의 메시지

구슬이 서 말이라도…

호수에서 작은 배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늙은 사공이 있었다. 그 배의 한쪽 노에는 ‘믿음’, 다른 쪽 노에는 ‘실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 승객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공에게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한번 보시오.”라며 ‘믿음’이라 쓰인 노를 힘차게 저었다. 배는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이번에는 ‘실천’이라 쓰인 노를 저었다. 배는 역시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이번에는 두 개의 노를 함께 저으니 배는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신앙인의 삶은 바로 이런 것이다. 행함 없는 믿음과 믿음 없는 행함은 모두 제자리를 맴도는 배와 같다. 그래서 전진하는 신앙, 열매 맺는 신앙이 되려면 행동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받은바 복음을 행동에 옮기고 실천해야 한다. 구슬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 할 건가? 꿰어야 보배인 것을. 성경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한다(약2:26).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약2:21).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약2:25), 바울 또한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교훈한다(빌4:9). 사도 요한 역시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기록한다(계1:3).

우리는 신앙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성도는 행동하는 신앙을 통해 믿음의 열매를 맺어 주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고, 이 땅에서도 주시는 풍성함을 누리며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2:20).

김상욱 목사

축복과 감사라는 쌍둥이

축복과 감사라는 쌍둥이

가장 좋은 것은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면 ‘축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좋은 친구들이 몰려들 것이다. 화해 친구, 물질 친구, 건강 친구, 만사형통 친구, 기쁨 친구…, 이런 축복 친구들과 함께 행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 민족은 감사는 할 줄 모르고 복만 받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복(福)자를 이불에도 새겨 넣고, 베개에도, 밥그릇에, 옷고름에도 새겨 넣고, 항상 정한수 떠놓고 복을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축복을 받으려면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감사하면서부터 축복은 몰려온다. 감사는 축복을 부르는 신호다. 축복을 달라고 말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만큼 감사를 해보라. 그러면 축복이 임할 것이다.

물을 연구한 에모토 마사루는 라는 책에서 물을 향하여 욕을 퍼부으면 물의 육각형 모양이 깨어지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물이 완전한 육각수로 바뀐다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물 위에다가 ‘망할 놈’이라고 써서 띄어놓고 록 음악을 들려주면 육각형이 제멋대로 찌그러지고, ‘고맙습니다’는 글을 써서 띄어놓으면 물이 완전한 육각형으로 바뀐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하여 말했다. 우리 인체는 70%가 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말을 하며 살면 우리 몸이 좋은 영향을 받아 얼마나 많이 좋아지겠는가.

감사하는 자체가 축복이다. 감사는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감사하면 축복이 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이 생기고 잘 되어서가 아니라 감사하는 자체가 축복이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에게 주어질 축복이 많이 대기하고 있는데, 감사하지 않아서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밀물처럼 축복이 들어오려다가 감사가 없어 썰물처럼 축복이 나가버리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이 그랬다. 나중에는 아예 감사는 하지 않고 불평만 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는 비참한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았다.

축복을 원하거든 먼저 감사하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임택함 목사

cjcc1004@hanmail.net

영생에 이르는 길

메트로놈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메트로놈’이라는 도구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소리를 규칙적으로 발생시켜서 음악의 빠르기를 기계적으로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이 기계는 다양한 사람들의 감각을 한결같은 빠르기로 맞출 수 있게끔 기준이 됩니다.

세상일이 어려운 이유는 그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출근 시간은 몇 분 전까지 도착해야 괜찮을까? 축의금은 얼마를 내야 할까? 운동을 몇 시간 해야 몸에 좋을까? 다 같이 먹은 음식 값은 나눠서 내야 할까? 내가 더 나이가 많은데 다 내줘야 할까?’ 등등 참 어려운 일들입니다.

저는 애매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제 아버지입니다. 어떠한 상황에도 아버지의 조언을 따라 행동하면 결코 실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여태까지 살아오신 경험을 비추어 항상 적절한 기준을 조언해주십니다.

기준을 정하는 조언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정말 한결같으신 분이십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기도하시고, 5시 반에 사우나를 다녀오시고, 7시 40분에 예배를 드리시고, 오후 6시에 한 시간 기도하시고, 자기 전에 기도하십니다. 예배나 다른 교회 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한결같으십니다. 가끔 보면 아버지는 기계가 아닐까 싶을 만큼 정확하십니다.

재미있는 건 우리 가족들은 다른 조언은 아버지께 많이 구하지만, 신앙이나 기도는 잘 구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신앙이나 기도의 기준은 우리가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정말 힘들기 때문에 아예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사실 아침에는 같이 기도하지만 저녁에는 세상으로 도망가기 일쑤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 잔을 피하게 하소서’냐고 핀잔을 주셔서 가끔 씩은 정말 이 잔을 어떻게 피할까 궁리하지만, 한결같은 아버지의 신앙이 존경스럽고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미꾸라지같이 잘 빠져나갈 때가 많지만, 신기하게도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는 말씀처럼, 우리가 아버지 곁에서 신앙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고, 기도가 우리도 모르게 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기도하는지 상상도 못했지만, 요즘은 기도를 한 시간씩도 잘하고 성경 말씀으로 부모님과 즐겁게 대화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아직 아버지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그 신앙이 스며들다 보면 언젠가는 저의 신앙도, 믿음 생활도 더욱 성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인생의 기준이 될 만한 사람을 곁에 주신 건 정말 대단한 축복인 것 같습니다.

김대화

realdialo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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