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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기로에서

994호 · 2019-03-18
주 안에서의 삶

지난달 맹장염이 세 번째 터졌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바로 맹장 제거수술을 하지 않고 먼저 고름을 제거하고, 괜찮아지면 맹장을 잘라내지 않은 채 놔둡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너무 무리한 탓에 또 터진 겁니다. 장기들이 모두 덧나있어 먼저 고름을 제거하면서 며칠간 장기들이 나아지기를 기다린 후에 드디어 맹장 제거수술을 하는데, 문제는 맹장이 대장에 붙어서 염증이 퍼졌기에 대장도 25cm가량을 잘라냈습니다. 그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혈압이 위험 수위로 내려갔습니다. 5시간 수술 후 2시간 반 회복실에 있는 동안에 의식이 돌아왔는데, 간호사들의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가 수술해놓고 죽였다는 말을 듣겠다.” 그들은 밤 10시가 되었는데 집에 가지 못하고 저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옆에 있는 혈압기를 보았습니다. 73/42mmHg,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주님을 부르며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수축기 혈압의 수치가 85mmHg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간호사들이 희망을 갖고 저를 일단 일반 병실로 보냈습니다. 일반 병실에 도착했을 때 다시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갑자기 사단이 제 온몸을 짓눌러 죽이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산소 호흡기를 하고 있었지만 호흡을 할 수 없었고, 온몸이 눌리고, 머리도 짓눌려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내가 귀신에게 지면 죽는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니 귀신아, 떠나가! 떠나가!”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혈압이 너무 낮아서 진통제 주사도 못 맞고 너무 아픈 상태인데도,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았습니다. 갑자기 귀신이 떠나간 것을 느꼈고, 나는 신음하며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께서 옆에 와주신 것을 느끼자 마음에 평강이 왔습니다.

그 뒤로 수축기 혈압은 다시 오르기 시작해서 거의 90mmHg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이틀에 걸쳐 수혈을 받고, 진통제 주사를 맞았습니다. 시커먼 먹구름이 지나간 듯합니다. 나는 계속 주님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고, 점차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이름의 능력 앞에 악한 마귀와 더러운 귀신들이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죽음의 기로에서 체험했습니다(요1:5). 살아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미국에서 권문선 목사

소망의 언덕

리더의 자질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그는 27명의 대원들과 함께 남극 탐험을 하던 중 예기치 못한 조난을 당했습니다. 부빙에 갇혀 난파된 배를 버리고 497일 만에 그들이 도착한 섬은 안전한 지대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작은 보트를 타고 1,400km가 넘게 떨어진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구조를 요청하러 가야 했습니다. 이때 섀클턴은 자신이 그 위험한 구조대를 인솔할 것을 자청하였고, 그때 다루기 힘들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 그리고 섬에 남겨진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만한 사람을 뽑아서 데리고 떠납니다. 모든 위험을 자신이 감당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한 달여간의 우여곡절 끝에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하여 구조를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대원 모두는 구조되었습니다. 지도자의 탁월한 리더십과 희생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 긴 시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희생과 섬김의 아이콘이 된 섀클턴 선장의 모습을 지난주일 2부 예배 때 단에 서신 총회장 목사님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오후에 태국집회를 위해 출국하실 예정이었습니다. 당연히 3부 예배만 오셔도 되셨을 텐데 그날 주일 아침, 목사님은 이른 2부 예배부터 인도하셨습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성도들의 심령을 데우셨습니다.

‘왜 목사님은 해외집회가 있어 비행기를 타셔야하는 그날에도 오히려 일찍 나오셔서 예배를 인도하셨던 것일까?’ 저는 혼자 질문했고, 그 답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고 희생이었습니다.

효율적인 선택을 버리고 목사님은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거룩한 낭비를 택하셨습니다. 그것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이 말입니다. 그러한 목사님의 삶을 묵상하다 보니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한 글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목사님께서 본을 보이시는 희생을 통로 삼아 형용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경험합니다. 저도 목사님의 사랑과 희생을 본받고 싶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이현승 전도사

coollee0817@naver.com

한라의 핀 샤론의 꽃

차이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간상은 주변과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할 때 가능하다. 모든 것이 개별화된 사회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할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가정, 교회, 학교, 직장 등 여러 형태의 ‘공동체’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 만드셨고, 서로 공감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때 참된 인간으로서의 충만한 은혜와 구원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교회는 다양한 인종, 계급, 성별은 물론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나 사물에 관한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이렇게 다양한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차이가 크게 나면 날수록 하나 되기는 그만큼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이전에는 함께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한 몸을 이루어 가까워졌으나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그 안에서 ‘우리’와 ‘그들’로 나누어 ‘우리’에 속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곤 한다. ‘우리’라는 틀 안에 들어온 이들과는 친절, 공감, 배려, 신뢰, 협력 등을 하면서 공동체를 지속시키다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드러나는 서로의 차이로 인해 ‘우리’라는 틀을 깨고 서로 등을 돌려 모르는 이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이처럼 ‘차이’로 생긴 갈등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원인이 된다.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자기중심적인 생각’만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우선되는 것이 아닌 ‘나의 의’와 ‘나의 뜻’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내세우며 싸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더라도 내 생각이 자기중심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면 상대방과의 관계에 벽이 만들어지고, 결국 공동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은 “공동체란 모든 것,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죄의 위험과 세상의 권력 아래 춥고, 서럽고, 어려울 때는 공동체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공동체적인 존재로 만드셨고 인간의 다양성과 차이를 적절히 조화시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공동체로 승화시켜갈 수 있는 해답까지 알려주셨다. ‘서로 돌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것’(히10:24), 또한 ‘서로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것’(고전1:10)이다. 이는 나의 지식이나 윤리적 견해를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지식과 입장에 비추어 스스로를 상대화하는 것, 즉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는 것이리라.

‘차이’라는 것은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다름’일 뿐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황에 맞춰 서로를 감싸 안을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권정미 집사

jmgood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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