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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4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신 분이시다 (민13:30~14:10)

994호 · 2019-03-18

왜 우리는 대업을 꿈꾸지 못하고, 무슨 일에든 불가능을 먼저 선언하고, 도전하는 것에 겁을 먹고 두려워할까요?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내 주제에 뭘 해?’, ‘배우지도 못한 내가 이걸 어떡해?’, ‘가진 것 없는 내가?’ 이래서 못한다고 단정하고, 스스로 한계를 긋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나 능으로 안 되는 게 많습니다. 더욱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한계를 느낄 때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나를 보던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한계가 있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우리가 보리떡을 강청할 때 성령까지 주시는 통 큰 분이시기에 더욱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믿음의 선친들도 다 그랬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주눅 들고, 인간의 한계를 느껴 낙담하고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큰 역사의 주인공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늙어가는 자신과 경수가 끊어진 아내를 보자니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아닌 여인에게서 자식도 봤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답답하셨지요. 그래서 어느 날 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끌어내셔서 ‘하늘의 뭇별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공기가 좋지 않아 하늘에 별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브라함이 본 하늘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걸 보는 순간 ‘아차!’ 했습니다. 늙은 자신을 봤던 것을 회개했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래서 100세에 아들을 얻어 결국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시나무 떨기 아래서 그에게 ‘네 민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산 자신은 낡은 옷과 헤어진 신발, 닳을 대로 닳아 반질반질한 지팡이가 전부인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닙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라며 계속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여러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셔서 하나님이 직접 이 일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고, 마침내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 연약할 때는 믿음의 선친들, 믿음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에게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고 했습니다. 처녀에게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마리아가 놀라 “무슨 소립니까? 사내를 알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아들을 낳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하기를 “늙은 네 친척 엘리사벳도 아이를 가져 이미 여섯 달이 되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깨달은 마리아의 믿음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12 정탐꾼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명에 따라 각 지파에서 차출된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갔습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똑같이 보고 돌아왔는데 그들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을 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반응을 내보였는가 하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민13:33), 즉 자신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보니 네피림의 후예에 비해 작고 턱없이 약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민14:9).

여러분, 나를 보면 한계가 그어집니다. 잘나봐야 사람인데요.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마리아처럼, 모세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일어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 대해 분개하며 맞싸우고자 할 때 그의 맏형이 화를 내며 뭐라 했습니까? “네 양은 어디에 두고 여기 와서 난리냐? 얼른 집에나 가라.”(삼상17:28)고 했습니다. 다윗을 막냇동생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가 함께 하심을 믿었기에 주머니에 넣은 물맷돌 다섯 개를 다 쓰지 않고도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직접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한계가 있는 우리를, 연약한 우리를, 지혜가 없는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즉 당신의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 곧 꿈과 소망과 희망을 갖게 하시고 그것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의 힘이나 능으로 이루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라고 말씀하심으로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 못하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했고, 저 역시도 동일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를 멸시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보겠다고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생각하사 그의 집에 유하셨고, 눈을 뜨겠다고 달려든 바디매오의 소원도 이뤄주셨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마11:12).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도 침노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이시대 목사가 교회 부흥의 일환으로 교구마다, 구역마다 배가(倍加) 운동을 지시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조장이나 구역장 중 더러는 ‘나는 못 한다. 평생에 배가 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며 뒤로 자빠진 자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보면 할 수 없지요. 그러나 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이뤄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하고자 하면 하나님과 천군천사와 주위의 긍정적인 사람들이 돕지만, ‘못한다’고 선언하면 ‘얼씨구나’하고 악한 것들과 부정적인 사람들이 주위에 헤쳐모여 하거든요.

여러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배웠습니다(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왕 바랄 것이라면 큰 것을 바라십시오. 입을 넓게 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채우십니다(시81:10).

어차피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성취케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작은 일, 큰일의 구분이 없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니깐 작은 일이 있고, 힘든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다 일반입니다. 그러니 이왕 구하는 것, 큰 것을 구합시다.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는 미쳤다는 말을 들을 만큼의 일을 구합시다. 나를 보지 말고, 내 형편 보지 말고 내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큰 꿈을 꿉시다. 고아를 왕비로 만드신 하나님, 목동을 왕으로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크고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꿈을 크게

이상을 높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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