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
지난 수요예배 때 이시대 목사가 설교한 내용을 저는 주일예배 때 다시 성도들에게 보여줬습니다. 이 설교가 이시대 목사의 일생일대 최고의 설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시대 목사는 정확한 핵심을 짚었습니다. 깨달은 자에게는 관용이 따르지만, 깨닫지 못한 자에게 관용은 독이 되고, 깨닫지 못한 자를 받아들이거나 용납할 경우 전적으로 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준 재산을 가지고 나가 그야말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가면 어떻게 생활할 줄 뻔히 알았지만 그를 만류하지도 않았고, 나간 뒤에 수소문해서 찾지도 않았습니다.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아버지는 사람을 풀어 아들을 끌고 올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깨닫고 스스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마침내 아들이 깨닫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4)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깨닫고 돌아온 아들은 이전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더는 탕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 끌고 왔다면 그는 언젠가 다시 집을 나갔을 것이고, 집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집안의 화근 덩어리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처럼 말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인데, 그는 누이 다말을 강간한 장형 암논을 죽이고 부왕인 다윗을 두려워하여 그술 외가에 3년간 숨어 지냅니다(삼하13). 세월이 흐르자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을 안 요압이 압살롬과 왕을 화해시키기 위해 한 여인을 왕에게 보내 압살롬을 사면하도록 계책을 꾸미고, 마침내 압살롬은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삼하14). 그러나 자그마치 2년이 지나도록 압살롬은 다윗을 알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화가 치민 압살롬은 요압을 만나기 위해 그의 밭에 불을 질렀고, 요압과 대면합니다. 압살롬은 요압에게 그술에서 잘 살고 있는 나를 불러 왜 고생을 시키느냐, 빨리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어찌 되었든 다윗과 압살롬은 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다윗과 상면 후 바로 반역을 준비합니다. 내부적으로는 다윗에게 향한 민심을 자기에게로 돌렸고, 왕위 찬탈 계획을 세운 후에 헤브론으로 가서 그 계획을 추진하여 왕을 곤경에 빠지게 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부왕의 군대와 싸우고 삼림 중에서 패주하다가 나무에 달려 죽습니다(삼하15,18).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는 압살롬은 깨닫고 돌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압에 의해 끌려 다윗에게로 왔기 때문에 만사 불평만 했고, 달라진 것 없이 오히려 더 큰 죄악을 도모한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자를 받아주고, 일을 시키면 안 됩니다. 인정상, 혹은 교회를 떠날까봐 받아주면 압살롬처럼 더 큰 폐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마음 문을 연 자에게 들어가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가출 청소년이나 바람난 남편을 찾아 나서지 말고 탕자 아버지처럼 기다려주세요. 깨닫고 스스로 돌아와야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끝내 깨닫지 못한 자를 버리십니다. 발람 선지자와 가룟 유다가 그 대표입니다. 막강한 아모리 족속을 물리친 이스라엘이 모압을 향해 진군하자 모압 왕 발락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발람에게 도움을 청하려 많은 재물과 함께 사신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 날 밤 꿈에 하나님은 발람에게 발락의 초대에 응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발람은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발락은 더 높은 귀족과 더 많은 재물로 다시 초대를 했고, 어리석게도 발람은 초대에 응해 길을 떠납니다. 발람을 등에 태운 나귀는 모압으로 향하던 도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도망하려하자 발람은 나귀를 때리며 길을 재촉합니다. 나귀가 사람의 말로 발람을 공박합니다. 그래도 끝내 발람은 깨닫지 못하고 모압을 향해 갔고, 그는 훗날 미디안 방백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민31).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고로 그 자리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고 하셨습니다. 그를 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들 서로 근심할 때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면서 같이 그릇에 손을 넣어도 가룟 유다는 깨닫지 못하였고, 그가 “내니이까?” 하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놓고 말해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은 삼십 냥에 예수를 팔고 그때서야 뒤늦은 후회로 자살하고 맙니다.
사울왕도 다윗이 두 번이나 생명을 살려주었고, 또 사무엘 선지자가 나무라고 경고를 해도 아말렉 전에서 좋은 소와 양을 취하고, 제사장 대신 제사를 지내는 등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왕관을 다윗에게 넘기셨고, 그는 자식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삼손도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해도 그렇지, 자기를 죽이려고 난리를 치면 끝을 내야지, 어떻게 진실을 토로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눈이 뽑혀 맷돌이나 돌리는 신세로 전락한답니까(삿16)? 그런 자들에게 들려주는 잠언의 말씀입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찌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27:22).
여러분, 깨닫는 게 복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죄가 없어 하나님과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얼른 깨닫고 회개했기 때문 아닙니까? 다윗은 남의 아내를 취한 죄를 회개만 한 것이 아니라 늙어서까지 동녀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윗은 늙어서도 부하고 존귀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대하29:28).
므낫세라는 왕이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므낫세는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지 못하고 이방신과 우상숭배에 빠져 히스기야가 헐어버린 산당이나 제단을 다시 세웠고, 바알과 아세라의 제단과 신상을 만들어 우상숭배의 탈선을 범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도 했습니다. 결국 예언자들의 예고와 같이 므낫세가 바벨론에 끌려가 사슬에 묶여 옥고를 치르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난 중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겸비함과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시고 왕위에 앉히십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섬겼던 우상을 제하고 여호와의 전을 중수하고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긍휼히 여겨 55년 동안 왕위가 지속되게 하셨습니다(대하33).
여러분, 깨닫는 게 복입니다. 그런데 더욱 큰 복은 고난당하기 전에 깨닫는 것입니다. 나오미처럼 남편과 자식 둘을 보내고 나서야 깨닫지 말고, 많은 처첩으로 인해 우상을 섬기던 때를 지나 늙어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12:1)고 한 솔로몬처럼 되지 말고, 지금 깨닫는 것이 복 중에 복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예수님이 많은 무리에게 여러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깨달았느냐’고 물으시니 다들 깨달았다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이는 깨달은 자는 참 제자, 참 목사가 되어 천국의 것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깨달은 것은 내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그 책이 내 것이 되는 것처럼, 말씀을 깨달으면 말씀이 내게 레마가 되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변화는 깨달을 때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탕자 아버지가 그랬듯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4)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며, 곳간의 주인처럼 하늘의 창고를 맡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깨달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지혜다
깨닫는 것이
최대의 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