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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호 목차 › 세상을 보는 창

하나님의 후사 (히브리서 1:1~4)

940호 · 2018-03-04
진리의 학당

성경에서 무엇을 보는가? 성경을 알고 누리는 행복이 있는가? 성경이 수정같이 맑아서 시작부터 끝까지 막힘이 없는가, 아님 이삿짐 부려놓은 것처럼 복잡하고 어수선한가?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이란 ‘신’이란 말이고, 아버지라 함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말이다(요17:1). 근본도 모르면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는 말씀을 성경의 근본(根本)이요 성경의 대의(大義)로 이해할 때 성경전체가 한 폭의 그림처럼 명료해진다.

성경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가 아니라, 영원 전에 아버지가 후사로 세우신 아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요17:11) 영광과 권세와 나라를 상속하시기 위한 설계와 과정이므로(마28:18), 성경은 하나님의 후사를 앎으로써만 풀어지는 구도로 짜여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 만물을 다 아들의 손에 주셨다(요5:35). 그러므로 하나님의 후사인 예수 그리스도를 초월하거나, 그가 보내신 성령을 거부하면서 신학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인본적 수단으로 분석분해하려는 사람에게 성경은 잡다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고 성경 속의 보화를 캐내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신학은 하나님을 말한다면서도 대체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이론을 전개하며 미궁에 빠져 있는 것일 터다.

옛적에는 선지자들이 부분적으로 말한 것을 예수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다(히1:1~2). 그때에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고, 성전에서 드린 제사는(히9:9~10) 예수가 이루실 일의 예언이다(히9:11~15).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에 지으리라’ 하심같이, 예수의 몸이 헐리고 부활하여 참 성전이 되셨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은혜와 진리이다(요2:19~21). 예언과 모형과 비유는 그 후사로써 완성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창조도, 이스라엘도, 성전도, 율법도, 제사도, 인류도 모두 하나님의 후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원리를 이해할 때 성경을 아는 기쁨과 함께 능력권세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요8:32).

하나님은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쁨’(마3:17,17:5)이라 증거하셨다. 오직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그 말씀이다. 예수 밖에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요15:5). 예수 밖에서 하나님께 열심을 다한 제사장, 장로,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인 살인자가 되었다(행7:52).

하나님의 후사를 빼놓고 인간을 말할 수 없다. 인간은 그의 모양이요 그의 선지자와 증인으로 쓰실 도구이기 때문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었으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고 또 고난도 함께 받는다(롬8:17).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바알세불에게 속할 뿐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의 후사인 나를 믿으라’(요14:1)하심은 하나님을 본 자 없지만 자신이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나타내셨음이다(요1:18). 우리는 허영스럽게 신앙생활 하는 것 아니라 그를 완전히 체험하였고 그를 보았고 그를 알고 영생하는 자들이다.

후사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요1:14)다. 입으로 진리, 진리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을 영접한 것이요, 그가 독생자로 보이면 영광을 받은 것이고 영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바알세불에게 속했던 안타까운 인생이 그 영광을 보았다(마4:14~16).

그를 후사로 봄으로써 그에게서 진리를 보았고 그에게서 은혜를 보았고 그에게서 영광을 보았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후사를 위한 하나님의 뜻과 역사요,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은 아들의 아버지시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요17:20~21)는 것이요,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셨다는(요19:30) 이것이 영생에 이르는 우리의 믿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박덕규 목사

pdkew12@hanmail.net

겨자씨만한 믿음

하나님만 보고 나아가자

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경기에서 임효준 선수는 우리나라에 첫 금메달을 안겨주었다.

임효준 선수는 인대파열과 골절 등의 치명적 부상으로 7번이나 큰 수술을 해야만 했다. 선수 생활 내내 그가 걸은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닌 부상과 재활이라는 힘든 시간들이었다. 임효준 선수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부상이 계속되는 동안 앞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힘들 것 같다는 불안도 함께 왔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과 스스로의 불안을 이겨내었고, 그는 결국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낼 수 있었다. 임효준 선수는 경기가 끝나고 플라워 세리머니 때 검지를 올리는 포즈를 취했었는데, 이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성경말씀(히11:1)과 같이 믿음은 당장의 눈앞에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눈을 뜨면 현실의 상황은 해결해야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기에 현실 그 자체가 고난일 수 있다. 하지만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가슴에 가득 차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소망을 품고, 이루어질 줄 믿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가 진짜 믿음의 사람이다.

고난이 왔을 때 절망하지 않으려면 삶 속에서 끊임없이 믿음을 훈련해야 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 무슨 일이든지 끝이 있고 영원할 수는 없다. 고난과 역경도 마찬가지이다. 고난이 왔을 때 믿음으로 받아들여 스스로의 그릇을 키우고 하나님께 더욱 쓰임 받는 존재가 되길 소망하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62:1~2).

김성일

cre8tor@naver.com

참된 깨달음

사랑한다면

아주 오래전에 이런 유행가가 있었죠? “사랑을 하며는 예뻐져요.”

누군가를 사랑하면 호박꽃 같던 얼굴도 백합화처럼 고귀하게 보이고 할미꽃 같던 얼굴이 장미꽃처럼 아름다워집니다. 두꺼비처럼 투박한 손도 어쩌면 그렇게 귀엽고 복스럽게 보이는지 다 좋고 다 예쁘고 모든 게 만사 OK입니다. 모자라도 모자라게 보이지 않고 넘쳐도 넘쳐 보이지 않는 게 사랑이 주는 힘입니다.

97년도에 신학생자격으로 영성훈련에 참석했는데 힘든 훈련과 비인격적인 몇몇 분 때문에 마음 문이 닫혀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주님 앞에서 감히 그럴 수 없어 꾹 참고 견디었지요. 그날 저녁 기도시간에 “나는 너를 사랑해서 내 생명까지 내어 주었거늘 너는 그것도 못 참겠더냐! 그 일도 못 하겠더냐?”고 묻는 매우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여 당신 품안의 독생자 외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주셨는데… 참으로 많이 울며 회개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 일도, 그것도 못 참겠더냐?”는 성령님의 음성은 지금까지 저를 이끌어준 에너지원이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깨달은 건 하나님의 일은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박한 성경지식으로 가득 채워도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기름부음으로 임하지 않으면 그저 성경지식에 그칠 뿐입니다. 하나님을 천만번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정말 내가 주를 진실로 사랑하는지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봐야 합니다. 진실로 사랑하면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행동이 먼저 나갑니다. 무슨 일이든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버지, 이 일만은 제가 해드리고 싶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고백하지요. “아버지를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요.”

김정옥 전도사

jcc01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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