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과 믿음은 다르다(렘42:15~17)
믿음과 고집은 간극이 넓지 않아 보입니다. 종종 믿음인지 고집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이란 종자, 곧 씨앗과 같아 점차 발전되고 변화되는 것이 있는 반면, 고집은 굳어진 화석 같다고나 할까요. 고집의 한자를 봐도 제 비유가 전혀 틀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고집은 굳을 고(固)와 잡을 집(執)으로 되어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사상, 뜻에 사로잡혀 전혀 융통성도 없고, 새로운 것을 용납하지도 않으며, 새로운 세계에 도전도,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고집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고집불통이란 말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고집이 있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그 안에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는 소신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나 대다수는 그 안에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모험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42장에 보면 이스마엘의 반역을 저지한 요하란이 모든 군대의 장관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들과 함께 예레미야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파국으로 치닫는 현재의 위급한 시기에 자기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주기 바랐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대로 곧장 그 뜻을 따르겠다고 약속합니다(렘42:5~6). 예레미야가 기도한 지 십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유다 땅에 남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간다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들은 요하난과 그의 일행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겠다고 해놓고 말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고집 때문입니다(렘42:15). 그런데 그들이 고집을 부린 이유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애굽에는 전쟁도 없고 식물의 핍절함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옛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사나, 애굽이 낫지’ 하는 두려움과 더불어 이 땅에 있으면 바벨론 왕의 보복이 임할 것 같아 두려웠던 것입니다(렘42:11). 그래서 고집대로 애굽으로 간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칭찬대신 진노를 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삼상15:3)고 하셨는데, 사울은 자기 생각대로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삼상15:9)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가 질타하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15:24).
여러분, 고집이 있으면 절대 순종할 수 없습니다. 내 뜻, 내 생각, 내 사상이 그대로 굳어져 있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 33년 동안 많은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실컷 상담해놓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라’ 하면 제 앞에서는 ‘아멘’ 해놓고는 자기 고집대로 합니다. 그러려면 애당초 상담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왜 고집을 부렸을까 생각해보면 제 말 대로 했다가 ‘망하면 어떡하나, 안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주의 종의 권고는 하나님의 권고하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집 부리면서 순종하지 않으면 재앙을 불러올 뿐입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갔던 아합이나(왕상22), 아사랴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고 향단에 분향하려고 고집했던 웃시야처럼 말입니다(대하26).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5).
더더욱 하나님 앞에는 고집이 통하지도 않지만 고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집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예’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고집불통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것과 타협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고집 대신 순종, 곧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은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에 가지 못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를 방문한 뒤 마게도냐에 돌아왔다가 다시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6장 6~10절에 자세히 쓰여 있듯 성령께서 마게도냐로 먼저 가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접고 ‘예’ 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런 그의 행위를 비판하고 바울을 우유부단하다고 하는 적대자들에게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19~20).
여러분, 믿음은 고집이 아닙니다. 혼동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순종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생각과 뜻을 피력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내 생각과 뜻에 부합되지 않더라도 ‘예’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 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에 대해 변명하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게 믿음입니까? 겸손을 떠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건 불순종입니다. 하라면 하는 겁니다. 가라면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부모와 친척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고집 피웠습니까? 아닙니다. 일단 보따리부터 챙겼습니다. 아브라함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거라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사람인데 왜 안 그랬겠습니까? 그러나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셨고, 그의 삶을 주장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제 생각이나 제 뜻을 버리고 무조건 ‘예’ 했습니다. 원주민을 상대로 해외선교를 시작했을 때 솔직히 왜 저라고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일단 그 나라 말을 모르는데요. 그러나 가라하시니 무조건 갔더니 하나님이 길을 여시고 인도하셔서 세계 72개국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순종하세요. 순종하면 하나님이 담력을 주시고 일을 성취시키십니다. 디도서에는 감독, 곧 교회 장로들의 자격요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딛1:7).
여러분, 고집은 마치 호리병 속에 든 망고를 움켜쥐고 있는 원숭이와 같습니다. 원숭이가 살려면 망고를 놓아야 하듯, 고집을 버릴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고, 새로운 삶이 전개될 것입니다.
우리, 고집을 버리고 믿음을 소유합시다. 할렐루야!
고집 = 두려움
믿음 = 담대함
진리(眞理)는 결코
다수결에 있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