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이 되는 삶
책을 싫어하는 자녀를 독서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 그건 부모가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하지요. 굳이 잔소리하지 않아도 아이는 부모를 따라서 자연스럽게 책을 펼치게 되고 독서의 즐거움을 알아간다고 합니다. 자신도 TV나 휴대폰만 보면서 우리 아이는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걱정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지요. 가장 좋은 교육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최근 저희 부모님은 시골에 사시던 외할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늘 쩌렁쩌렁하고 당차셨던 외할머니는 한해, 한해 눈에 띄게 몸이 허약해지셔서 깜박깜박하는 것도 잦아지시고 가끔 대소변을 실수하기도 하십니다. 그런 외할머니를 귀여운 아이처럼 저희 엄마는 돌보고 계십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외할머니가 잡수시기 좋게 식사를 챙겨드린 후 몸을 깨끗이 씻겨드리고 말동무가 되어드리는데, 이 모든 일을 귀하고 소중한 일처럼 기쁘게 하고 계시지요. 엄마를 보면서 배우게 되는 게 참 많습니다. 훗날 저희 엄마가 할머니가 되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껏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을 엄마의 행동을 통해 저절로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말보다 행동으로 제자들에게 본이 되셨지요. 제자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지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찌해야 되는지 예수님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셨고 이를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벧전2:21~25).
저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지만 밖에 나가 전도하는 일엔 소극적이어서 항상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총동원주일이 되면 친한 친구들을 한 번씩 교회에 데려오곤 했지만 그 친구들 중에 꾸준히 교회를 출석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리 친해도 억지로 교회를 나오게 하고 만날 때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았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친구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는 거였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을 제 삶에 첫 번째로 두고 힘든 일이 생기면 불평하기 보단 기도하며 매사 감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친구들은 그런 저를 보아왔고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예수님을 믿는 친구든 믿지 않는 친구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게 전화를 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작년 하와이에 있을 때 매주 수요예배와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그걸 옆에서 본 친구가 힘든 일이 생기자 제게 물었습니다. “난 태어나서 한 번도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는데…, 기도하는 방법 좀 알려 줄래?”
이라는 책을 쓴 조엘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역이 있습니다. 교회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이 강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역경을 헤쳐 나가는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지, 얼마나 꾸준한지를 지켜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보다 행동을 먼저 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는데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삶 가운데 기쁨을 잃지 않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선하게 대하며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하지요. 그럴 때마다 생각해봅시다. 지금 나의 행동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지 가리고 있는지. 그리고 기도해봅시다. 오늘만이라도 사역이 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5:15).
신은혜
dopal0203@naver.com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음력 1월 1일은 설이다. 구정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양력 1월1일이 새해다. 그런데 새해 첫날의 명절은 음력 1월 1일이다. 정부에서는 구정을 없애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신라시대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우리 문화를 정부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새해는 양력 1월 1일이고, 음력 1월 1일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로 지내고 있다. 설이면 설빔을 입는다. 아이들에게는 꼬까옷이라는 색동저고리,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를 새로 만들어 입혔고, 어른들은 두루마기, 도포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신발까지 새로 준비하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래서 설이란다. 설에는 가족과 이웃에게 음식을 나누며 세배와 덕담, 민속놀이를 하며 친교를 나누는 최고로 기쁜 날이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양력 1월 1일은 새해다. 그러나 실질적인 새해는 그들의 음력 7월 1일이다. 그 날은 성경에서 나팔절이라고 한다. 나팔절도 새롭게 살자는 의미로 나팔을 분다. 나팔은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인데, 이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팔을 불어 새로운 해의 기쁨을 온 세상에 알렸다. 나팔절 또한 새롭게 되자는 갱신의 의미와 더불어 예배, 친교, 구제의 의미를 담은 이스라엘 축제의 날이다(레23:23~2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절과 더불어 30년만의 더 큰 민족의 축제를 주셨다. 그것은 바로 평창 동계올림픽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더욱 큰 의미는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새해 첫 하나님의 선물이고, 동북아의 평화와 세계평화로 확장될 수 있는 기회이자 마중물이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유행되는 키워드가 있다. 21세기는 ‘콜라보레이션’이다. 이를 번역하면 ‘협동’, ‘제휴’, ‘공유’라는 의미이다. 20세기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한 커뮤니케이션에서 한발 더 나아가 21세기는 콜라보레이션이 더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번 명절과 축제를 통해서 가족과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서로 협동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며 더 나은 콜라보레이션을 이루어나가길 소원해본다.
이정금 전도사
jungkm@nate.com
여유가 있다면
고등학교 시절 나는 뉴질랜드란 나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슬슬 대입 준비로 머릿속은 정신없고, 한참 사춘기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마음이 복잡하던 시기였던 터라 뉴질랜드로의 유학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그곳의 환경과 분위기가 너무 느긋해서였을까, 그곳에서의 생활은 마치 하나님께서 세차게 흘러내려가는 강물 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곤 그 강물을 바라보시며 ‘봐라, 이게 바로 세상 돌아가는 거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그 후의 유학생활은 참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때 그 시절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고,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조금은 거시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버스를 다시 탄 날이었다.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가까스로 멈추고 탄 승객과 기사님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고 왜 저렇게들 마음의 여유가 없을까 생각하며, 모든 것이 빨라야 하고, 또 빠른 한국의 생활에 점차 다시 적응해갔다.
하루는 예배가 끝난 후 교회에서 나오며 서로 다투고 있는 두 성도님들을 보았다. 왜 저러실까 생각하다 문득 나의 모습도 되돌아보니 어느덧 그때의 마음 속 여유보다는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금 세찬 강물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에 욱 하지 않는, 누구의 말도 편안하게 경청할 줄 아는, 내 말이 하고 싶어 안달하지 않는, 아등바등하지 않고 흘러가는 물에서 편안하게 주변을 살펴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스도의 평안, 점점 더 세차지는 세월의 흐름 속에 그리스도의 평안이 늘 내 마음에 임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박찬영
cross35@hanmail.net
앎과 믿음
일곱 살,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가 생각난다. 아이들 훈련시키느라고 선생님께서 저기 저 운동장 끝에 있는 나무를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오라고 시켰다. ‘요잇, 땅!’ 하니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 때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자기가 있던 자리로 어떻게 다시 돌아올까. 그래서 주위를 살펴보고 돌을 찾아서 내 자리를 동그랗게 그려놓고 뛰었다. 당연히 꼴찌였다. 뛰어 돌아와 동그라미 쳐진 내 자리에 선 아이를 밀치고 그 자리에 섰다. 내 생각에는 무작정 제자리에 다시 돌아오라고 시키는 선생님도 이상했고, 무턱대고 뛰어가는 아이들도 이상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 보면 ‘왜?’와 ’어떻게?’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수학 잘 하는 아이들은 ‘미분 적분, 이거 왜 해야 하지?’ 묻고 시작한다. 하지만 다른 보통의 아이들은 그저 공식만 외운다. 그렇지만 ‘왜?’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공부를 잘한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기 위해선 왜 이렇게 됐을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자기 신앙과 자기 믿음을 분별해봐야 한다.
믿음과 앎에 대해서 깨닫고 적어 놓은 글이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앎 또한 들음과 체험으로부터 오니 내가 주를 앎으로 더욱 믿음이 깊어지고 주의 뜻을 알며 행하는 자, 즉 의인이 되리라. 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뜻하니(what God wants),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 행하는 자, 곧 의인이라는 호칭을 받는다. 믿음과 앎은 하나이다. 깊이 알수록 믿음은 깊어지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의인이 된다.’
이광주 전도사
leekjlkj@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