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논리로는 예수를 알 수 없다(고후10:1~8)
성경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모순투성이입니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태양이 멈출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 그림자가 뒤로 가고, 어떻게 홍해가 갈라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귀머거리의 귀가 뚫립니까? 아무런 도구도 없이 어떻게 사람이 물 위를 걷습니까?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이런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이론과 논리로 풀 수 없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기이한 일들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들이 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론과 논리로는 하나님을 알래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쥐꼬리만 한 지식이나 이론이나 경험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고, 우리를 손수 빚어 만드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 피조물의 잣대로 창조주를 잰단 말입니까? 언어도단(言語道斷)이지요. 그건 마치 10cm짜리 자 하나만 달랑 들고서 지구의 크기를 재보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알량한 잣대를 내려놓으세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이론, 논리를 버리세요. 그것이 하나님과 당신을 막는 견고한 진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트려버려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은 모든 면에 아주 쟁쟁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체로 자랑할라치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4~6). 참으로 명예로운 호칭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가 하나님을 만나자 완전히 변했습니다. 자신의 간판과도 같았던 종교적 배경이나 학문적 배경들을 다 더러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과거의 화려한 전력들은 하나님을 아는데 걸림돌이 될뿐더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그것들은 냄새나는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빌3:8~9).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6:14). 이런 바울은 하나님 앞에 ‘아니요’가 없이 오직 ‘예’만 하며 순종했습니다.
왜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줄 압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이 내 지식이나 이론, 논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시몬, 곧 베드로의 배에서 말씀을 전하시고는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때 시몬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베테랑 어부인 시몬의 이론이요 경험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 어디에 그물을 내려도 없습니다. 오늘은 그물을 접는 게 최선입니다. 제 어부 경력이 얼만데요.” 이런 말입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마음을 돌이켜 자신의 경험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그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자 물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너무 많이 잡혀 다른 배를 불러 두 배에 채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견고한 진을 내려놓은 자가 받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된다고 하셨고,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5:5).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봐도, 아내를 봐도 너무 늙어 생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았고, 첩 하갈에게서도 자식을 봤습니다. 과학적으로나 이치적으로는 아브라함이 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해와 상식을 넘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 아들 이삭을 주셨으니 말입니다. 이를 경험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예’ 했습니다. 그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맛보았기에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그의 생각이 적혀 있습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생각이나 경험 속에 거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어마어마한 복을 받았습니다(창22:17~18).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가 죽었습니다(요11). 이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이틀이나 더 머무시다가 그곳에 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덤의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 나흘이나 돼서 냄새가 납니다. 아무리 주님이라도 이건 아닙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론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시니 죽어 냄새까지 난 자가 동여맨 채로 나와 걸었습니다.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러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이건 되고, 이건 안 됩니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물 위로 걷는 것을 본 베드로가 자신도 걷고 싶다고 하자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물 위를 어떻게 걸을 수 있어?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마음이 동하자 파도가 겁났고, 결국 그는 물에 빠졌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시며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론이나 논리를 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론과 논리로 하나님의 일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믿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라고 하셨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저울질하고 잣대질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자에게 기적과 이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담이 높으면 음지가 깊어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음껏 일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께 먼저 순종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나중에 이해했듯, 우리도 언젠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의 초등학문을 버리고 오직 순종하여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체험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할렐루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다
담이 높으면
음지가 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