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친들의 공통점을 깨달으라(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더라”(창26:12~13).
여기 ‘이삭’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어보세요. 어떻습니까? 당대에 백배의 축복이라니… 상상만 해도 좋지 않습니까? 제발 우리 모두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삭이 거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운이 좋아서 그리 된 것도 아니고, 부모를 잘 둬서도 아닙니다. 이삭은 그만한 대가를 치렀기에 그런 복을 누린 것입니다.
이삭은 원래 목축업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국땅에 와서 농사를 시작한 겁니다. 안 해본 농사를,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지으려니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것뿐이면 다행이련만 이삭을 힘들게 한 것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이삭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한 그랄 목자들이었습니다. 농사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인지라 이삭은 땅을 개간하면서 열심히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우물을 파고나면 그랄 목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 우물을 빼앗고 우물을 메워버렸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네 차례나 그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삭에게 배울 점이 있습니다. 네 번 정도 실패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거나 좌절할 겁니다.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놈인가 보다’ 하고 자포자기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반드시 농사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했습니다. 기필코 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정신이 네 차례 우물을 빼앗겼지만 다시 우물을 파게 했고, 마침내 다섯 번 만에 큰 우물인 ‘르호봇’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빼앗기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요즘처럼 장비가 좋은 것도 아니었을 테니 무진장 고생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뜨거운 눈물을 많이 흘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일어나 우물을 파고 땅을 일궈 부를 축적한 것입니다.
뭔가 일을 이뤄낸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이 ‘기필코’ 정신이 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더불어 씨름을 하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지경이 되어도 기어이 축복을 받겠다던 야곱이 그랬고(창32:22~32),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 문을 열기 위해 갈멜산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했던 엘리야가 그랬고(왕상18:19~46),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겠다며 엘리야를 좇은 엘리사가 그랬습니다(왕하2). 하나님이 저를 쓰시는 이유 역시 임전무퇴의 정신,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기필코 정신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7~8).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너희를 위해 다 준비하고 있는데 너희가 끝까지 구하지 않고 열릴 때까지 두드리지 않기 때문에, 즉 기필코 정신이 없어서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삭에게서 이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싶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선친들의 삶을 보면 그리 평탄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렇게 험난한 삶을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편안하게 일을 이루실 수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대를 이을 자식은 곱게 키우지 않는다’는 말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세가 왕자로 살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킬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를 이리저리 굴려서 낮아지게 한 다음 그로 하여금 애통하며 기도하게 하여 그를 능력자로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통솔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통솔력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단 번에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 대신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들 못하시겠습니까. 마른 뼈들로 군대가 되게 하시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방법은 달랐습니다. 요셉이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희생을 치르게 한 다음에 그곳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또한 풍전등화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손이 짧아 못 건지시겠습니까만, 하나님은 에스더의 희생의 금식기도와 용기를 담보로 부림절을 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여러분,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려고 할 때 안쓰러워서 그것을 빼주면 나비는 절대 날지 못하고 곧 죽습니다. 나비가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고자 애쓰는 동안 그 고치에 있던 액체가 흘러 나와 날개를 적시게 되고, 그러면서 점차 단련된 날개로 변화해 힘차게 날아오를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귀한 자식이라고, 사대 독자라고, 무남독녀라고 ‘오냐오냐’ 하면서 키운다면 그 자식은 온실 속의 화초 같아서 바람만 세게 불어도 죽습니다. 그러니 한 단체의 지도자, 한 나라의 영도자, 한 시대의 영적 선지자로 세우는데 그냥 세우시겠습니까? 눈물도 흘려보고, 쓴 맛도 보고, 울부짖으며 간구도 하면서 지혜도 얻고, 힘도 얻고, 경험도 얻게 되어 성장하는 것입니다. 요즘 캥거루족들이 많습니다. 덩치는 산만한데 아직도 부모에게 붙어사는 자들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된 줄 압니까? 왜 나잇값도 못하고 그러고 있는지 압니까? 다 부모 잘못입니다. 너무 곱게 키우니까, 다 해줘 버릇하니까 그리 된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습니까? 성공은 고사하고 제대로 사회에서 구실이나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부모가 달아주는 날개로 살 겁니까? 남이 달아주는 날개는 언젠가 떨어집니다. 내 스스로 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호랑이도 우리 안에서 사람이 주는 음식이나 먹고 자라면 고양이처럼 됩니다. 사람 눈치나 보고 애교나 떨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태생이 고양이라도 야생에서 키우면 호랑이 버금가게 되는 겁니다. 독수리도 새끼를 기를 때 벼랑에서 떨어뜨려 스스로 날개 짓을 배우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믿음의 선친들을 하나 같이 고난과 역경을 거치게 하신 것은 야생의 호랑이로 자라 세상을 향해 포효하라고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고난을 주신 것은 고난을 통해 능력을 키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좌절하고 낙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눈물로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치를 빠져나올 때의 고통이 결국 내 힘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을 외삼촌을 통해 단련하신 하나님, 바울을 훈련하신 하나님은 당신도 훈련을 이기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장성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넘어졌다고 울지 말고,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세요. 빼앗기고 빼앗겨도 다시 일어나 우물을 판 이삭처럼 말입니다.
또한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들을 강하게 훈련시키세요. 눈물 젖은 빵도 먹어보게 하세요. 넘어졌다고 바로 일으켜주지 마세요. 스스로 일어나게 하세요. 그래서 모든 것의 가치를 알게 하고, 귀한 것도 알게 하세요. 대가를 치르지 않는 공짜는 쥐덫에나 있다는 것도 알게 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할렐루야!
살아 있는 물은
솟구치는 물이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그 가치를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