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기도의 힘
기도가 없이 주의 일은 한걸음도 진보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주님께 대한 목마름은 한도 없고 끝도 없어야 한다. 주의 일에 대한 부족함은 목회자라면 어느 누구나 느끼는 것이고, 그래서 엎드릴 때마다 ‘할 수 없다’는 고백과 눈물로 주님을 감동시킬 뿐이다. 만약 주의 힘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면 무릎 꿇는 기도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때부터는 사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주여 이 죄인이’란 찬양은 고백적 의지의 표현이고 절규다. 주님에 대한 목마름은 호흡이 정지될 때까지 간직해야 한다. 소멸되는 그 순간부터 사망의 길을 향해 가는 것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목마름을 상실했던 엘리 제사장을 주께서 과감히 버리시고, 순전했던 어린 사무엘을 택하여 부르셨는데, 버림받은 엘리 제사장의 반면거울을 통해 그 뜻을 알았던 사무엘은 죽는 순간까지 기도로 의지했다(삼상12:23).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무엘을 보시고 그가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을 지켜 주셨다(삼상7:13). 오직 한사람 사무엘로 인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주신 것이다.
오직 한사람, 오직 그 한사람. 그 한사람 같은 자에게 미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금식기도로 그 한사람이 되고자 주님께 집중한다. 또한 열망한다. 내일을 향해 팽창해 나가는 주의 나라, 의의 합당한 도구로 더욱 쓰이기를 간절히 원하며….
‘가장 위대한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기도의 부족은 모든 것의 부족이다’, ‘기도가 끝난 자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목사님의 외침이 귓가에 맴돈다.
이구원 목사
사랑을 나누자
왜 음란한가? 인간성이 저급하기 때문이다. 음란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가 고상할 때만 가능하다. 음란은 내가 중심이고 사랑은 상대가 중심이다. 음란은 상대와 그의 주변을 파괴시키는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사랑에는 그와 그가 속한 세계를 견고히 해주는 관심과 따뜻함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음란은 내 욕심과 쾌락, 욕정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것이고, 사랑은 상대를 위해 내 것을 주는 것이다.
음란한 또 다른 이유는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성적인 수단 외에는 상대에게 나를 특별한 존재로 각인시킬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를 사로잡기 위한 마음이 간절하여 그것이 얼마나 천박한지도 모르고 음란한 눈짓과 몸짓을 보낸다. 뿐만 아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가장 성적인 매력이 있는 것은 돈이다. 노골적으로 돈을 보여주고, 돈을 주면서 유혹한다.
음란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마라. 사랑은 성적인 것으로 그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사랑도 그에게 인정받고 싶고 특별한 존재이고 싶지만, 수단은 진실된 마음과 세심한 관심이다. 음란의 폭력성을 알고 있기에 극도로 경계하고 싫어한다. 음란에 대한 분명한 테두리와 기준을 정해놓고 최대한 멀리 떨어진다. 한층 나아가, 더 고상한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알아주지 않아도 크게 실망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와 그의 세계를 존중하고 더 아름다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기에, 내가 그와 그의 세계에 속하지 않아도 크게 아파하지 않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봐주고 응원해주고 염려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과 음란의 가장 큰 차이는 누가 중심이냐는 것이다. 상대가 중심이면 사랑이고, 내가 중심이면 음란이다. 나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그를 조정하려든다면, 음란인 것이다. 음란한 사람에게 상대는 소모품이다. 상대의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아무데나 버려버린다
성이란 인간 마음과 관계 속에서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며 그 영향력도 가공할 만한, 거대한 것이다. 따라서 성에 대해 더 깊은 고찰이 절실하며, 그 고찰을 토대로 꾸준한 가르침이 있어야 절벽 위에 선 우리 세대가 돌아설 수 있다. 죽을 길에서 살 길로….
박소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