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 부활의 비밀을 맛보라(요11:17~44)
부활이란 ‘다시, 돌아올 부(復)’와 ‘살, 소생할 활(活)’로 이루어져, 말 그대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어느 종교도 부활에 대해 증거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도착하신 것은 이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이틀 뒤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는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라비의 소식을 듣자마자 금방 달려오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흘 뒤에야 당도하시자 마르다가 원망스런 투로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텐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4)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그 말씀이 내세와 현세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 같은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죽은 나사로를 그 자리에서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근거가 됩니다. 첫 사람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 안에서 의를 입은 사람은 모두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고전15:22). 계란이 사람 손에 잡히면 계란 프라이가 되거나 찐 계란이 되어 먹히고 말지만, 암탉 품에 거하면 21일 만에 병아리가 되듯, 예수 그리스도 품 안에서 우리는 새 생명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생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내세의 부활, 종말론적 부활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마르다처럼 말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에도 예수 부활의 역사는 일어나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안 믿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슨 부활이냐는 겁니다. 부도나서 파산한 기업이 어떻게 부활하느냐는 겁니다. 다 깨진 가정이 어떻게 부활되고, 암 말기인데 어떻게 건강을 되찾겠느냐는 겁니다. 주의 종들 중에도 그런 신앙은 기복신앙이라고 주의하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믿느냐? 믿으면 부활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십니다. 믿기만 하면 네 기업이, 네 가정이, 네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가시는 곳에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머거리가 듣고, 각색 병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베드로의 빈 배를 채우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고통과 불행이 행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히1:8). 그러니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우리 삶 안에 부활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이생은 어쩔 수 없으니 꾹 참고 있다가 천국에나 와라. 거기서 이생에서 누리지 못한 것을 누려라’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잘살고, 지금 병 낫고, 지금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빈민촌에 전도를 하러 갔답니다. 그런데 한 집에 들어가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예수 믿으세요.” 했더니만 그 집 주인이 그러더랍니다. “아니, 지금 사는 게 지옥인데 무슨 나중이요?” 그 때 그 목사님이 깨달은 것이 바로 ‘이생의 축복’이었답니다. ‘그래,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도 잘 된다고 하셨는데, 내가 그것을 알리지 못했구나.’ 하고는 그 후로 예수를 믿으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해진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전했더니 교회가 창대해졌다고 했습니다.
제가 세계 각국에 나가서 전하는 것이 부활의 소식입니다. 그 전에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것은 그 부활의 현재성을 보고 내세의 부활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의 삶에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은 부활의 역사는 눈물 속에서 탄생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빠를 잃은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 펑펑 울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모 같은 오라비를 잃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말입니다. 하도 울어대니까 예수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습니다(요11:35).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그 증거가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곧 죽으리라는 언도를 받은 히스기야가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어대자 하나님이 바로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해주었고(사38:14), 한나가 무자한 것에 대해 애통하자 그에게 사무엘을 주셨습니다(삼상1:10). 또 다윗이 남의 아내를 취한 죄를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자 하나님의 위로가 넘쳐났습니다(시6:6).
당신 삶이 살아나기를 원합니까? 당신 기업이, 국가가, 교회가, 당신의 가족이 죽었습니까? 죽어서 썩은 냄새가 진동합니까? 울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하여 울면 동정뿐이지만, 부활되신 예수님을 향하여 울어대면 부활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감동하시면 그 분이 부활의 역사로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을 왜 죽었다고 합니까?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막에도 물만 있으면 꽃이 피어나고, 생물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 삶이 사막화 되었기에 모든 것이 죽은 것입니다. 거기에 부활은 없습니다. 그러니 울어야 합니다. 오빠인 나사로를 잃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심히 울었던 것처럼, 하갈이 광야에서 방성대곡했던 것처럼, 우리가 울면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신 예수님이 부활의 역사를 우리 삶에 일으키실 것입니다. 야이로라 하는 회장장의 무남독녀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의 눈물을 보시고 그 딸을 살리셨고(막5:22~43),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도 그의 눈물을 보시고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눅7:13~14).
그런데 왜 울지 않습니까? 왜 울지 못합니까? 내 몸이 병들었는데, 내 자식이 말을 안 듣는데, 수출이 막히고 계속 적자를 내는데, 내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답보상태인데, 내 나라가 지금 위태로운데 왜 울지 못합니까? 자존심 이 밥 먹여줍디까? 우세요. 부활이신 예수님이 감동하실 수 있게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내세의 부활도, 이생에서의 부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있습니다.
다들 부활절을 행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것이 되어 내세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 삶 속에 역사가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또한 그 부활의 기쁨과 역사를 나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하여 그들도 부활에 동참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죽음 후의 부활뿐 아니라
현재 삶속의 부활이 있다
사막에도 물이 있으면
새 생명의 꽃을 피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