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 더러움 = 악(잠24:30~34)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31:40). 이것은 야곱의 고백입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왕상19:10). 이것은 엘리야의 고백입니다. 다윗 역시 주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119:148). 사도 바울도 부지런히 사역했음을 전합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2:9).
미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에게 기자가 “성공의 비결이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글쎄요, 내가 남들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한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한다면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그것 외에 내세울 다른 것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현대 신화를 쓴 정주영 회장, 그는 쌀가게 시절부터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해가 빨리 뜨지 않는다고 역정 냈으며, 7시면 회사로 출근했다고 합니다.
영적인 사람이든 육적인 사람이든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부지런한 자가 성공하고 부귀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12:24),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잠12:27),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13:4),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한 마디로 부지런함과 게으름은 마치 빛과 어두움처럼 극과 극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24:30~34)는 말씀을 저는 깊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게으름=더러움=악’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게으른 자가 더러운 것은 자명한 일이고, 더러운 곳에 악, 귀신이 틈타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이 꼭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핑계 대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미 그들을 간파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잠26:13~15).
마태복음 25장에 그런 자가 나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돈을 맡기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마25:16)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마25:17)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둘 다 즉시 부지런히 장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을 파고 그것을 묻어뒀습니다. 게으름 피운 거지요. 그리고는 주인이 와서 회계하자 핑계를 댑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마25:24~25). 자기의 게으름을 탓한 게 아니라 되레 주인을 탓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5:26~30)고 했습니다.
이런 썩은 생각을 잘라내야 게으름을 떨칠 수 있습니다. 두 친구가 사냥을 가다 그만 한 친구가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늪에 빠진 친구가 허우적거리자 더욱 빠져들었습니다. 밖에 있던 친구가 소리쳤습니다. “이봐, 그 늪은 그리 깊지 않을 거야. 발을 땅에 대봐.” 이에 늪에 빠진 친구가 허우적거리며 말했습니다. “안 돼. 난 이제 죽을 거야.” 그러자 밖에 있던 친구가 사냥총을 친구에게 겨누며 말했습니다. “내가 자네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네. 잘 가게.” 그리고는 방아쇠를 잡아당기려 하자 늪에 빠진 친구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늪을 뛰쳐나와 친구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를 구해줄 생각은 않고, 날 죽이려고 해?” 간신히 친구가 진정되자 그가 총을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를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 아니네. 너의 썩은 생각을 겨눈 거야.” 썩은 생각은 잘라내야 합니다. 뿌리가 썩은 나무에 물을 주면 더 썩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아들 녀석과 목욕탕에 간 일이 있습니다. 욕탕 속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아들 녀석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가르칠까 궁리하다가 아들 녀석의 머리를 탕 속에 쳐 박고 힘껏 눌렀습니다. 놀란 아들은 머리를 빼내려고 애를 썼고, 저는 더욱 힘껏 눌렀습니다. 숨이 가픈 아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머리를 쳐들고 물 위로 올라와 저에게 버럭 화를 냈습니다.
“아니, 성공하는 비법을 가르쳐달랬는데 머리는 왜 물 속에 쳐 박아요?” 화를 내는 아들을 향하여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속에 쳐 박히니 어떠하더냐?”, “죽을 것 같았어요.”, “무슨 일이든 죽을힘을 다하면 못할 게 없단다. 지금 네가 한 것처럼 말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생각하고 노력한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성공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성경은 미물인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했을까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6:6~11).
게으른 자는 자기만 궁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망하게 합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10:26). 이빨을 초에 담가 놓아보세요. 다 삭아버릴 것이고, 눈에 연기를 쏘면 눈물만 펑펑 쏟고 앞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게으른 자를 쓰면 손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연이요 지연이요 혈연이라 해도 게으른 자를 쓰면 안 됩니다.
일하기 싫습니까? 도전하기 싫습니까? 노력하기 싫습니까? 배우기 싫습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고 사는 수밖에요.
예전에 현모양처의 이미지는 남편과 자식에게 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잠언 31장의 현숙한 아내 상(像)은 부지런한 여인이라 말했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잘 간수함은 물론이고, 외부활동까지도 능동적으로 잘 하는 여인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슈퍼우먼이지요. 성경은 주의 종들도 부지런하라고 하십니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잠27:23). 주의 종들뿐 아니라 성도들도 그래야 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1~13).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게으름=더러움=악’이요, ‘게으름=무책임’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부지런한 자가 됩시다. 할렐루야!
평생 직장은 있으나
평생 직업은 없다
게으른 사람은 현재뿐이고
부지런한 사람에겐 미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