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적(마음) 온도는 몇 도(oC)?
-훈련을 하다보면 늘 한계가 온다. 근육이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순간…. 이런 순간이 오면 가슴 속에서 뭔가가 말을 걸어온다. ‘이 정도면 됐어‘, ‘다음에 하자’, ‘충분해’ 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이런 유혹에 문득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 포기하면 안한 것과 다를 바 없다. 99℃까지 열심히 올려놓아도 마지막 1℃를 넘기지 못하면 영원히 물은 끓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끓이는 건 마지막 1℃, 포기하고 싶은 그 1분을 참아내는 것이다. 이 순간을 넘어야 그 다음 문이 열린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갈 수 있다.(김연아의 7분 드라마 중에서)-
모두가 아는 상식이지만 물은 99℃에서 절대 끓지 않는다. 물은 오직 100℃라는 온도에 도달하였을 때만 끓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두고 사람의 인생과 빗대어 곧잘 이야기하곤 한다.
얼마 전 종영한 TV프로그램 강연100℃는 바로 이 온도를 가지고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지혜를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이 나와서 100도℃ 강연을 한다. 강연 후 방청객들의 심리로 공감 퍼센트를 측정하는 교양 프로그램인데 그래서인지 더 공감이 가고, 왠지 모르게 힘이 생기며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되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100℃에서만 끓는 순수한 물은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그런 모습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물을 끓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열을 가해 끓는점까지 이르게 하는 방법과 반대로 끓는점을 낮추는 방법. 즉 불순물이 들어간 물은 100℃가 되기 전에 끓어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물이 더러울수록 끓는점은 더욱 내려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첫사랑이 아마도 100℃ 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편안하다 안일하다 하는 나태함 속에서 신앙의 임계점이 낮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끓는점, 전도의 끓는점, 사랑과 봉사, 그리고 감사의 끓는점에 타협과 게으름이라는 불순물을 섞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흉년이 들어 모압으로 내려간 나오미처럼, 세상을 사랑해 나간 데마처럼 말이다.
우리 몸의 온도, 체온은 36.5℃이다. 그런데 1℃만 떨어져도 면역력이 30%나 감소하고 반대로 체온이 1℃ 올라가면 면역력이 5배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1℃는 숫자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임계점으로 볼 때는 큰 차이가 난다. 인생을 살다가 조금 힘들어서 99℃에서 타협을 하면 1℃ 차이로 끓지 않는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각종 질병에 노출되기 쉬운 상태가 되듯이 우리의 인생도 신앙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 흥분된 심장이 지금도 동일하게 뛰고 있다고 고백한 우리 목사님은 지금도 “차선은 없다. 오로지 최선뿐이다.” 라고 외치며 신앙의 온도 1℃를 더 올리고 계신다. 예수님을 사랑한 모든 믿음의 선친들, 특히 마리아는 그의 인생이요 삶의 순전한 나드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마음의 온도를 1℃ 더 올려 믿음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신의 영·혼·육의 온도는 지금 몇℃ 인가?
99℃의 물은 그냥 뜨거운 물이지만 1°C만 더하면 열차와 배를 움직이는 뜨거운 수증기를 만들 수 있다.
이정금
jungkm@nate.com
장점을 보자
어느 마을에 두 명의 청년이 있었는데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습니다. 한 청년은 결혼을 하자마자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매일 한가지 씩 아내의 단점을 지적해주었습니다. 몇까지 단점만 고치면 완벽한 아내가 되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그의 아내는 완벽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져만 갔고 기존의 장점들마저 사라져갔습니다. 그 가정에는 하루도 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청년은 결혼을 하자마자 아내의 장점을 찾아내어 하루에 한 가지씩 칭찬을 했습니다. 그 가정에는 항상 웃음꽃이 피었고 부부는 더 없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요? 칭찬 듣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가 사명 감당했으며, 칭찬받은 백부장 고넬료가 이방인의 첫 열매가 됐으며, 배가 시킨 종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마25:21)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또 충동적인 베드로를 끝까지 찾아가 사랑을 확인하시고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요21:15~17) 하셨습니다. 도마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기보다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주님!
우리 이초석 목사님도 예수님의 그러한 마음이신 듯합니다. 늘 다혈질이던 부족한 종을 그리도 긴 시간 용서하시고,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아주 작은 믿음의 모습을 보시고는 그렇게도 기뻐하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목사님…. 베드로가 그랬고, 도마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목숨 바쳐 충성하여 맡겨진 사명 감당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해봅니다.
김상욱 목사
ksw9669@hanmail.net
신뢰회복!
검은콩 한말과 흰콩 한 말을 섞는 데는 한 순간이지만 다시 원래대로 고르려면 한 나절로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처럼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처음 신뢰를 얻었던 때보다 훨씬 더 힘든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 것은 두 번 속고 싶지 않은 탓에 상대가 더 엄격하고 신중한 마음관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백년된 나무를 자르는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리치몬드에 사는 한 그리스도인이 사업을 하다가 파산하여 힘들게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그 사람이 교회 복도를 지나다가 자신을 위해 힘껏 기도해주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따뜻하게 그의 손을 잡으면서 “좋은 일이 있다면서요?” 하며 인사를 건네자 그 사업가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잘못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되물었더니 “예, 사업에 실패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끝까지 성실하게 채권자들을 상대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제 신뢰를 건졌으니 다시는 돈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목사님은 격려해주었습니다. 이에 낙심에 빠져있던 그 사업가는 새 출발하여 재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뢰를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과 희생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말고 멀리 보는 큰 안목으로 신뢰를 지키는 일에 전심전력해야할 것입니다. 왜냐면 신뢰는 다른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반드시 얻어야할 핵심명제이며 더 강력한 성공의 지름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시3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