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믿음이 있는 자, 지칠 줄 모른다 (삿11:1~6)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29:20).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1~2).
위 말씀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들 모두 꿈을 가진 자였고, 그들은 그 꿈을 향하여 질주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으며, 믿음의 전당에 오른 선친들이 그랬습니다. 그분들이 우리와 성정이 달라서 위대한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그들은 꿈이 있었고, 오로지 그 꿈을 향해 질주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는 꿈이 있습니까? 당신은 어떤 꿈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까? 혹 지금 당신의 삶이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진정 삶이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꿈이 없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헬렌 켈러는 “맹인으로 태어난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시력(eyesight)은 있으되 비전(vision)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성경에도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29:18)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이 꿈을 버린 까닭입니다. 사람들을 상담하다 보면 꿈을 상실하고, 꿈을 포기하고, 꿈을 버린 자가 너무 많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주제 파악한 겁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이 아닙니다.” 등등 운명 탓, 환경 탓, 시대 탓을 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다 변명으로 들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입다를 볼까요? 그는 기생의 소생입니다. 출신도 서러운데 그의 이복형제들이 가문의 수치라며 쫓아내어 잡배들과 함께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꿈이 잉태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겨 이스라엘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잡배를 훈련하여 마침내 전쟁에 이기게 됩니다. 운명론적 사고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한 중풍병자에게 네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만나면 친구가 중풍병에서 낫는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예수님의 근처는 고사하고 뵐 수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꿈이 있었기에 남의 집 지붕을 뚫어 예수님 앞에 친구를 내려놓았고, 결국 그들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환경 탓은 곧 변명이라는 겁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의 꿈은 귀신 들린 딸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7:27)며 무시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일부러 개 취급한 것이지만, 당시는 이방인을 업신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며 포기하지 않더니 결국 그 꿈을 이뤄냅니다. 시대 탓도 핑계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꿈을 꾸지 못하는 이유는 분수라는 잣대로 꿈을 재기 때문입니다. 꿈은 분수라는 잣대를 가져다 대는 순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분수껏 살라고 합니다. 네 주제를 파악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꿈이 뭡니까?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꿈이 아닙니까? 분수에 맞는 꿈이 어디 꿈입니까? 그러니 분수라는 잣대를 버리고, 인간의 환경에서 하나님의 환경 안으로 들어와 원대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입다도 하나님의 환경 안에서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가 전쟁에 나가기 전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곧 하나님의 환경으로 들어온 것임을 입증합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환경 안에서는 믿음이 됩니다. 자주 말하지만 미물만도 못한 쥐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뒷간에서 살 수도 있고, 곳간에서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환경으로 들어가면 주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빌4:13). 왜냐하면 전지전능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9:23).
모세도 환경을 바라보니,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일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래서 못한다, 안한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경 안으로 들어가니 가나안에 대한 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80의 나이에 장정 숫자만 200만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못한다, 안 된다’ 하는 어린 신앙으로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환경 안에서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장성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시편 81편 10절의 말씀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큰 꿈을 가졌다면 그 꿈을 키워 가야 합니다. 씨를 심으면 바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싹이 나고 가지가 나고 잎이 난 다음에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꿈도 일련의 과정을 지나야 거둘 수 있습니다. 즉 노력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해서 악한 것들이 틈타지 못하도록 소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급합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꿈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꿈은 여러분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기다리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스스로 꿈을 접었기 때문에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뿐입니다.
요셉이 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들이 들에 나가서 곡식을 거두는데 형들의 곡식 단이 다 일어나더니 자기 단을 둘러싸고는 넙죽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또 하늘의 해와 달과 열한별이 쫙 둘러서더니만 자기를 보고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정말 범상치 않은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요셉의 비전(vision)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쉽게도, 빠르게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덩이에서 죽을 뻔 했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애굽의 종으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으며, 각고의 노력으로 보디발의 가정 총무에 올랐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걸려 다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떡관장과 술관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이제나 저제나 옥에서 건져내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러고도 2년이 지나서야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꿈을 꾸고 난 후 13년이란 세월이 흐른 겁니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후에 곡식을 얻으러 온 형제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니 13년 전에 꾼 꿈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전에 사하라 사막을 건넌 사람은 장사꾼과 군인들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정복자와 거부의 꿈이 있었기에 죽음의 모래바람 속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꿈과 믿음은 여러분이 간직해야 할 가장 큰 보물입니다. 이 꿈과 믿음이 당신을 지치지 않게 할 것이고, 이것으로 인해 당신이 행복할 것이며, 이것이 결국 당신을 성공으로 이끌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미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할렐루야!
분수라는 잣대로
꿈을 재지 말라
먹구름을 보지 말고
먹구름 넘어 태양을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