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렸다고 말하지 말고 다르게 봐라 (롬8:1~18)
한 초등학교 저학년 시험문제에 ‘겨울이 가면 ( ).’가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겨울이 가면 눈이 녹아요.’, ‘겨울이 가면 신나게 놀아요.’ 등등의 답을 썼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답을 다 오답 처리했습니다. 왜요? ‘겨울이 가면 봄이 옵니다.’라는 선생님이 정한 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아이들이 틀린 겁니까? 아닙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답과 달랐을 뿐입니다. 수학적인 답은 언제나 하나이지만, 예술적인 답은 여러 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다른 것과 틀린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다르다’의 뜻은 ‘비교되는 대상이 서로 같지 않다’는 뜻이고, ‘틀리다’는 ‘옳다’의 반대개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과 틀린 것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것을 틀렸다고 했을 때, 남을 정죄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옳은데, 남이 틀렸다고 생각해서 남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헐뜯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60평생을 살아보니 예술에 답이 여러 개이듯, 인생에도 답이 여러 개입디다. 인생은 수학적인 계산법만으로는 풀 수 없습디다. 피카소와 고흐의 화법이 다르듯 제각각 인생의 화법도 다 다릅디다. 살아온 환경, 타고난 성품, 교육정도, 상황 등등으로 인해 어떤 사람의 인생을 내 잣대로 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남미에 가면 인사할 때 남자건 여자건 처음 봤건 관계없이 양 뺨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합니다.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의 정서에는 절대 맞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와 다를 뿐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언젠가 해외에서 오신 목회자 한 분이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무표정하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 분 정서로는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고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른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럼요, 남을 정죄하기 전에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저의 제자들 중에는 교회를 안 짓는 것에 불평하고, 틀렸다고 정죄하고 교단을 나간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생각이 다를 뿐입니다. 성령을 모신 곳이면 어디든 성전이라는 생각이 제게 있고, 또한 교회를 짓는 것보다 한 영혼이라고 더 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남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양성이지요. 그러면 이해하게 되고, 더는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직장 안에서, 가정에서 화합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범하기 쉬운 일이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큰 아들이 있으면 공부 못하는 막내에게 너는 틀렸다고, 너는 왜 매일 축구만 하냐고 하는 경우 말입니다. 큰 아이와 막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부모라면 “너는 형과 다르구나. 형은 공부를 좋아하는데, 너는 축구를 좋아하는구나. 축구해볼래?” 할 것입니다. 실제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의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학교선생님이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할 수 없다고, 저능아라고 했을 때, 이들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네가 틀린 게 아니야. 너는 다른 아이들과 많이 다를 뿐이야.”라며 아이를 끝까지 믿어주며 격려했기에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수학적인 계산법이어야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에는 여러 답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하는 이 답 외에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요즘 종교 다원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어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와 원불교 등이 ‘사랑으로 하나 되자’고 하고 있는데, 천천만만의 말씀입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신앙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틀린 겁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제사 지내는 거요? 천주교는 제사 지내라고 하는데, 왜 기독교는 안 되냐고, 또 더러 교회에서도 지내도 된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만 왜 유독 안 된다고 하느냐고 물으시는 분이 있는데요. 이건 다른 게 아니라 그들이 틀린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하나님의 말씀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벗어난 경우는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요, 교회 안에도 분량의 문제는 존재합니다. 믿음의 분량이 때로는 틀리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몸이 아프니까 병원에 간다고 하면 “믿음도 없지. 왜 병원에 가? 다 귀신이야. 목사님께 안수 받고 귀신 쫓아.” 이렇게 말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병원에 가고 싶은데 믿음 없다는 소리 들을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경우 말입니다. 이 경우는 교회 안에서도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또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롬14:1~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경우도 있습니다. 헌금 문제인데요. 교회의 필요에 의해 교구에서나 구역에서 헌금을 독려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성도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믿음이니까, 축복 받을 거야 하면서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도 형편과 믿음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레위기에는 제사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그 중 속죄제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인데, 속죄제의 제물을 보면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는 수송아지를, 이스라엘 회중이 범죄한 경우도 수송아지를, 족장이 범죄한 경우는 흠 없는 수염소를, 평민인 경우는 형편에 따라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양이나 산비둘기를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5장 11절에서 12절에 보면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찌니 이는 속죄제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산비둘기마저도 못사는 자들은 고운 가루로 그것들을 대신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그 원칙을 깨뜨리면서까지 극빈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두신 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한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내가 다 옳을 수 없습니다. 내 방법, 생각이 아닌 남의 것도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정죄하기 전에 다른 것을 인정합시다. 그러나 신앙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음으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삽시다. 그러면 이 세상은 물론 내세에서도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대화의 출발은
다름의 인정에서부터
인생에 타협은 보약
신앙에 타협은 독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