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를 치른 자만이 그 가치를 안다 (시126:1~6)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무엇에든 무슨 일에든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 옷을 사도, 작게는 껌을 사도 대가를 치러야 내 것이 됩니다. 또 작은 것을 사려면 돈을 적게 내지만, 자동차나 집을 사려면 거금을 내야 하듯, 작은 일을 성취하려면 적은 노력과 희생이면 족하지만, 대업에는 그에 상응한 노력과 희생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대가는 노력이나 희생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결과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대가를 치른 자만이 그 가치를 아는 법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고, 노력이 있었습니다. 애쓰고 힘쓴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5천년 문화민족의 긍지를 지켜왔고, 일제침탈의 억압 속에서도 죽음으로 자유해방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열들이 있었습니다. 공산세력의 위협 속에서도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피가 이 땅을 적셨고, 폭압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젊은 희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잿더미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독일의 탄광으로 간호사로, 또 저 열사의 나라에 젊음을 바친 분들이 있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을 돌린 부모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희생과 노력을 모르기 때문에 ‘전쟁이나 났으면 좋겠다.’는 괴상한 소리나 하는 겁니다.
기독교의 변천사도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과 같은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가깝게는 아펜젤러와 같은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복음을 누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선친들도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대가, 곧 실로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치렀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을 떠났고, 그의 아들을 제물로 내어놓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라는 축복을 따냈습니다. 야곱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그의 형 에서를 피하여 찾아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정말이지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가 라반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여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출31:38~40). 어디 그 뿐입니까?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그는 무려 십사 년을 봉사하며 기다렸습니다. 요셉이 치른 대가 역시 절대 작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가 꿈 하나 해몽 잘해서 신데렐라가 된 것이 아닙니다. 어처구니없이 당한 현실 앞에서 그는 좌절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습니다. 부지런함과 성실, 정직…. 노예의 신분으로 가는 곳마다 신임을 받은 것은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약관의 나이에 국무총리 대신이 된 것은 그의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희생의 결과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전무후무한 지혜와 복을 받은 것도 일천 번제라는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림절의 축복이 주어진 것도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희생의 금식기도와 용기가 담보되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거저 얻으면 가치를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거저 주었더니 가치를 모르고 마귀의 밥이 되어 에덴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외아들을 둔 부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늦게 얻은 아들이라 아까운 게 없어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답니다. 그러다보니 아들이 너무 헤픈 겁니다. 뒤늦게 아버지는 이렇게 키워서는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네가 직접 돈을 벌어오너라.” 돈을 쓸 줄만 알았지 벌어본 적이 없는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짜증스런 얼굴로 방을 나오자 이 말을 엿듣던 어머니가 “걱정마라. 엄마가 돈을 줄 테니 네가 벌어왔다고 하면 된다.”고 아들을 도닥였습니다.
이틀 후, 아들은 어머니가 준 돈을 들고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돈을 벌어왔습니다.” 하며 돈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받고 아들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활활 타고 있는 페치카에 돈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덤덤히 이를 바라다볼 뿐이었습니다. “이건 네가 번 돈이 아니야. 네가 직접 번 돈을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았니?” 아들은 ‘어떻게 아버지가 눈치 채셨을까?’ 하고는 방을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것 역시 페치카에 던져 버리고는 직접 돈을 벌어오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속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하는 수 없이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아버지께 갔습니다. “아버지, 이 돈은 정말 제가 벌었습니다.” 하며 돈을 드리자 아버지는 이 돈도 페치카에 던져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내 돈! 안 돼요!” 하며 아버지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네가 번 돈이 맞구나. 돈을 벌어보니 돈의 가치를 알겠지?” 하며 아들을 힘껏 안았습니다. “네, 아버지.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았습니다. 돈을 아끼겠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 우리는 이처럼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요?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엄청난 대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수욕을 참으시며 그 몸에 물과 피를 다 쏟으시는 엄청난 값을 치르셨습니다. 대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값없이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싼 값이 아님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는 엄청난 대가를 이미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고, 우리가 잘못을 해도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반면 신앙에도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많은 것을 희생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신앙의 저해요소는 다 잘라내고 가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린 자가 곡식의 귀중함을 압니다. 눈물로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성공의 진가를 모릅니다. 힘들고 애쓰는 일이 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당신이 맺을 결실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담하지 말고, 기쁨으로 후일을 바라보십시오. 현재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공짜는 독약에만 들어있다
세상에 절대 공짜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