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도 인정하는 크리스천
자식을 보면 그 부모가 보인다고 하지요. 밝고 예의바른 아이를 보면 부모가 좋은 사람일 것 같고, 욕을 잘하는 아이를 보면 부모가 집에서 어떤 말을 쓰는지 대충 감이 옵니다. 붙임성 좋은 아이를 보면 부모도 넉살이 좋을 것 같고, 버릇없는 아이를 보면 그 부모에 그 아이겠거니 하게 되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 우리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식의 행동은 부모의 얼굴이지요.
이것은 세상 부모자식 간의 얘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식 된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크리스천의 행동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가늠하곤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닌다는 정치인이 부정을 저지르면 그 사람만 욕을 먹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다니는 교회, 기독교, 더 나아가 하나님까지 욕을 먹게 되지요. 반대로 성실하고 매사 귀감이 되는 크리스천을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저 사람이 다니는 교회에 한번 나가볼까?’ 하고 마음을 열곤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먹칠할 수도, 빛나게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예전에 저는 기독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사람을 보면 가시 돋는 말로 항변하기 일쑤였습니다. 누군가 진화론을 주장하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조목조목 반대했었지요. 그래야 이기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런 말로는 그들의 생각을 조금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안 좋게 할 뿐이었지요. 제 마음 또한 시원한 게 아니라 찜찜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머니는 디도서 3장 9절을 찾아주었습니다. “어리석은 변론과 다툼이 될 만한 이야기는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바울의 말은 세상 사람들과 대화할 때 가져야 할 지혜를 가르쳐주었지요.
이제는 압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잘못된 편견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요. 그것은 말이나 변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크리스천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바른 행동을 하며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 그 일상에 있다는 것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술과 담배를 멀리 해야 하는 이유, 험담을 피해야 하는 이유, 용서할 수 없어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 없는 중에도 베풀어야 하는 이유, 마음의 폭을 넓혀야 하는 이유, 양심을 지켜야 하는 이유,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 다 여기에 있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된 이상, 우리의 행동은 우리만의 것이 아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교회에서 인정받는 크리스천을 넘어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크리스천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 다름 아닌 우리 크리스천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뿐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 혹은 직장 상사에게도 칭찬받는 사람, 교회 친구뿐만 아니라 세상 친구들에게도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 나와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신은혜
dopal0203@naver.com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 나간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면 그 장군을 선두로 시가행진을 했는데, 그때 뒤따르는 노예에게는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란 라틴어로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노예의 외침은 개선장군을 향해 전쟁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부와 명예와 권력에 취해 자신을 망각하지 말 것과 더불어 오늘 전쟁에 승리했다 해도 너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설교 중에 여러 번 총회장 목사님께서도 목사님 자신의 무덤을 준비해 놓으셨고, 기도원에 가실 때마다 반드시 그 앞에 가셔서 자신을 돌아보고 사명을 확인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인간으로서 진정한 겸허함이 아닌가 싶다.
성경은 곳곳에 인간의 죽음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 애굽 왕 바로 앞에서 백삼십년의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통해 야곱은 인생의 고달픔을 표현했고, 예수님께 인정받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영혼까지 영영한 죽음의 길에 처하는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예수님과 한 날에 사형집행을 받았던 두 강도의 죽음은 죄인의 모습은 같았으나 완악한 마음과 돌이키는 마음의 차이로 영벌과 영생을 받는 차이를 보여준다. 날마다 자신을 쳐서 죽음의 자리에 두고자 했던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마지막으로 단두대에 목 베임 받는 순교의 길을 갔다. 사도 바울의 목이 잘려 사형장 계단을 세 번 튈 때 잘린 목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예수, 예수” 하고 외쳤다한다.
죽음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이 땅에서의 삶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깨달아 죽음 뒤에 세상을 지금의 삶으로 고백하는 자는 많지 않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사랑의 고백을 드릴 준비를 하며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자문자답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하서연 전도사
ohzion1004@daum.net
사랑의 법!
이른 아침 조용하던 성전이 갑자기 시끄러워지면서 한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의 손에 붙들려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끌려옵니다. 다들 큰소리로 한마디씩 합니다. “죽여라! 죽여! 죽어 마땅하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 죽이라는 겁니다(요8:1~11).
모두가 주님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주목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예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며 한참을 가만 계시다가 기다리고 있는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들 앞에서 말씀 대신 무언가를 땅바닥에 쓰십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고소하는 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글씨를 씁니다.
율법으로 보면 그 여자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법은 이 세상을 정죄하는 법이 아니라 구원하는 사랑의 법입니다. 율법의 의를 외치는 군중보다 죄악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한 사람을 선택하시는 우리 예수님! 모든 사람이 율법의 정신을 망각한 채 공의만을 붙들고 외칠 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법, 긍휼을 외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간음한 이 여인! 아니 이 시대의 모든 죄인들!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시는 주님 앞에서 공의와 도덕이 아닌 사랑의 법을 배우게 되는 장면입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용서한다.” 이 여인은 결국 그 용서와 사랑의 법에 변화되어 일생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범죄를 용납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롬3:23)과 아무도 남을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마7:1~5)을 깨달아 사랑의 법을 행하라는 교훈적 말씀입니다.
김경현
kyunghyunjudy.kim@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