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어머니 품에 평화가 있다 (눅2:14)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이런 가사로 시작하는 옛 유행가입니다. 저는 이 말이 100%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사랑은 희생이 따르고, 희생은 눈물 없이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사랑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이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 배려하게 되고, 남을 먼저 생각하면 상대의 유익을 구하게 되고,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기업에서, 사회 안에서, 교회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내 가족을 위해 내가 조금 양보하고, 우리 기업을 위해 내가 조금 참고, 사회를 위해 내가 불의를 행치 않으며, 교회를 위해 내가 무례히 행치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이 사랑이 결국 평화라는 자식을 낳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정이 시끄럽습니다. 사회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에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함인데 평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의 결핍이 가정을, 사회를,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나를 생각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은 곧 나를 배려하는 것이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곧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사랑이 평화라는 자식을 낳아 내가 평화 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사랑을 주면 가정이 평화롭습니다.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면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평화 안에 거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에 인색하면 가정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면 나도 힘듭니다. 사주가 직원들에게 사랑을 주면, 즉 사주가 직원을 먼저 생각하고, 직원을 배려하고, 직원의 유익을 구하면 그 기업이 평화롭게 됩니다. 그러면 직원만 좋은 게 아니라 사주가 더 좋습니다. 왜요? 직원들이 회사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을 할 테니까요. 결국 직원을 사랑해주는 것은 사주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회가 어지러워보세요. 누가 힘듭니까? 내가 힘듭니다.
사지가 병들어서 죽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오장육부에 병이 나면 몸이 주저앉습니다. 죽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외적보다 무서운 것이 내적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왜 깨집니까?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라 가족 간의 문제 때문입니다. 가족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를 위협하는 존재도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끼리 싸우고, 기업과 기업, 노사가 싸우면 이 나라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17:14). 그러니 싸움을 그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남을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분명히 이 나라의 평화를 낳을 것이며, 내가 그 안에 그 안에 거하게 됩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12:25).
지난 8일, 우리는 서울시청광장에서 평화통일 기도성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통일을 이루고자 함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리였습니다. 서울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성도들에게 제가 벅찬 가슴으로 전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어머니 품에서 평화라는 자식이 나온다.’
북한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북한정권은 정말 악하고, 엉뚱하기 그지없고, 막무가내이고, 무슨 짓을 할 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대입니다. 말조차도 통하지 않는 상대입니다. 그래도 단절하면 안 됩니다. 대화를 계속해야 합니다. 돈을 줘서 무기를 사게 하면 안 되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지원은 계속해야 합니다. 정말 속상하죠. 먹을 것 넘겨주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동해로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으니 정말 밉죠.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랑은 눈물의 씨앗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정말 통하지 않지만, 이 통할 것 같지 않는 이 사랑이 반드시 때가 되면 평화라는 자식을 낳게 될 것입니다. 임신하면 힘들지 않습니까? 더욱이 해산하려면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고 인내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를 낳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이 결국 평화통일을 낳고 말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왜 우리만 사랑을 해야 합니까? 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하십니까? 여러분, 사랑은 힘 있는 자, 가진 자, 높은 자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가졌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힘이 더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왜요? 평화를 낳기 위해서 말입니다.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대가가 필요합니다. 희생이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새 교훈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어떻게 사랑하라 하셨는가 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죽이려는 자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북한에 손을 내미는 건 당연한 우리의 몫이 아닐까요?
저는 정치인은 아닙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친북성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사랑이 평화통일로 가는 길을 인도할 것이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꿈을 꾸듯 머잖아 통일은 옵니다. 무력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이 곧 옵니다. 그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사랑을 보내는 것입니다. 무모한 것 같지만, 그것이 결국 평화통일을 앞당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어머니가 평화를 낳습니다. 사랑이라는 어머니 품에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은 연약해보이지만, 핵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더 크고 날카로운 칼을 부르지만, 사랑은 사랑을 낳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까닭입니다. 죄만 짓는 인간들, 악행을 일삼는 인간들을 때리고 쓸어버릴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고 가슴이 아프고 힘들어도 사랑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자녀를 얻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요3:16~17).
여러분! 이번 서울시청광장의 평화통일 기도성회를 통해 우리 교단과 우리 성도들에 대한 자부심, 자긍심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저는 분명히 하나님이 이 교단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결속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한다면, 우리 교단은 더욱 부흥 발전할 것이고, 하나로 똘똘 뭉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열쇠는 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굳어진 마음도, 휴전선도 이 사랑이라는 열쇠만 있으면 다 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랑합시다. 평화를 낳을 때까지. 할렐루야!
사랑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한 선물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