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받기를 원하면 주는 자가 되라 (눅6:38~39)
요즘 생각이 많습니다. 올해가 목회 30년이 되는 시점이기도 하고, 또한 가정에서도 여러 일들을 당하면서 깊이 인생을 재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여 내린 결론은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베풀면서, 주면서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는 성경 말씀이 요즘 가슴에 절절히 와 닿습니다.
여러분, ‘부자로 죽을 것인가, 부자로 살 것인가’ 하는 명제의 답은 너무 명확합니다. 당연히 부자로 살아야 합니다. 부자로 사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남에게 주면서, 베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에게 주는 것은 절대 마이너스(-)의 삶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플러스(+) 삶이요, 나아가 곱하기(×) 삶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 증거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남에게 주면 하나님이 다시 주시는데,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릇에 누르면 더 들어가지요? 거기에 흔들기까지 하면 훨씬 더 많이 들어가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제 목회 30년을 돌아보면 정말 그랬습니다. 저는 지금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목회나 생활이나 아주 풍족합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먹을 거, 입을 거 걱정을 안 합니다. 자식들보다 더 잘해주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제가 정말 많이 주었더라고요. 하나님께는 물론이고, 가난한 목회자들이나 이웃에게 정말 많이 주었습니다. 시계 풀러준 것은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옷이며, 자동차, 심지어 건물까지 다 주었더니 오늘날 하나님이 제가 가졌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훨씬 많이 주셨음을 새삼 알게 됩니다. 이건 제 자랑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제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잊히지 않는 일이 있는데, 인천 숭의동 교회에서의 일입니다. 벌써 27년 전쯤의 일이지요. 어느 날 저녁 무렵, 교회 사택에 앉아 있는데 거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밥을 해주던 사람에게 있는 쌀을 다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쌀가마에 1/3 정도 쌀이 있더군요. 그것을 다 거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저녁 지을 쌀도 남기지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두 시간이나 흘렀을까요? 당시 감리교 권사였던 이상순 장로
(인천교회)가 전화를 해서 햅쌀 한 가마를 보내주겠다고 하는 게 아닙니까? 이것도 놀라운데 연이어 상도동에 사는 집사가 쌀통에 쌀 한 가마니를 보내겠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쌀 1/3 가마 주고 순간 쌀 두가마니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게 된 것도 지극히 작은 쌀 반 가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기도원을 찾는 형제자매들을 무료로 먹이겠다고 결심하고, 사택에 있던 쌀 반가마를 내려 보낸 후 기도원을 내려가다 한국건설의 정 장로 부부를 만났습니다. 취지를 설명했더니 흔쾌히 동참을 표했고, 그들은 쌀 200가마를 차로 실어 보냈습니다. 이것이 오늘까지 수천 명을 무료로 먹이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주면 줄어들 것 같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삶을 산 자들이 잘 되고 잘 살게 된 것을 성경도 입증합니다. 성경 사도행전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가이샤랴에 주둔하고 있던 이달리야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식민지 백성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서 의인이라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무슨 복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그의 집으로 보내셨고, 베드로를 통해 성령을 받고 방언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최초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정확히 짚어줍니다(행10:4).
다비다라는 여제자 역시 노인과 과부에게 많이 준 자입니다(행9:36). 그런 그가 죽자 그 곳의 제자들이 급히 베드로를 청하여 그에게 받은 사랑을 베드로에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녀를 위해 기도했고, 다비다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흔들어 눌러 넘치게 되돌려 받은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교단이 세계를 교구화 삼을 수 있었던 초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비디오테이프와 오디오테이프를 무료로 전 세계에 준 것 때문입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미국으로 테이프 10개를 보내려면 일인당 십만 원 가량이 들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었지요. 그런 식으로 세계 어디서든 신청만 하면 무료로 줬습니다. 다들 어쩌려고 그러냐고 했지만, 저는 그것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을 축복하셨고, 비디오가 들어간 지역마다 오늘날 예루살렘 지경이 되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당신이 외아들을 주셔서 인류를 얻었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준다는 것은 꼭 물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나는 줄 것이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웃음을 주는 것,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 남을 배려하는 것, 다 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흔들어 눌러 넘치게 오는 하나님의 법칙이 그대로 이뤄집니다. 운전을 하고 가다 가끔 시비 붙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그 때 욕을 먼저 해보세요. 그러면 그 욕이 흔들어 눌러 넘치게 돌아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아내에게 말이라도 살갑게 하면 반찬이 달라질 것이고, 남편에게 웃음이라고 선사하면 퇴근 때 스카프 한 장이라도 선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배려하면 뜻하지 않게 더 큰 것으로 되돌려 받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왜냐?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갈6:7). 남에게 주는 것은 꼭 되돌려 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는 삶이 복되다(행20:35)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때,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사무엘상 25장에 등장하는 나발은 갈멜산 지역의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양털을 깎는 큰 잔치에 그의 우양을 늘 돌봐준 다윗이 먹을 것을 청하자 다윗을 무시하며 거절했습니다. 자기는 진수성찬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 자기만 알고 나눌 줄 모르는 이 어리석은 나발은 아내 아비가일의 지혜가 아니었다면 다윗에게 개죽음을 면치 못할 처지였으나 결국 자기의 수명을 재촉하여 며칠 앓다가 죽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가 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나발을 죽이려 군대와 함께 올라오는 다윗을 내려가 영접하며 안돈시키고, 먹을 것을 제공하더니 남편 나발이 죽은 뒤 다윗의 아내, 곧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주는 지혜가 보상하는 영광이 이 정도입니다.
언제 갈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갈 때 바리바리 싸가지고 갈 것 아니지 않습니까? 다 빈손 들고 갑디다. 그러니 욕심 부리지 말고, 주는 삶, 베푸는 삶을 살아봅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어느 것과도 비할 수 없는 귀한 것을 받았습니다. 그 분으로 인해 구원을 받고 그 분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것을 나누지 못하고, 주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주신 분이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경건은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우리 모두 참된 경건의 삶을 살아봅시다. 할렐루야!
줄 게 없는 게 아니라
줄 마음이 없는 것이다
부자로 살 것인가
부자로 죽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