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저버리지 말자 (삼하9:1~10:5)
얼마 전 일입니다. 중국의 어느 여학생이 페이스북에 너무 빠져 공부를 등한시하자 어머니가 야단을 좀 심하게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이 어머니가 잠시 시장에 간 틈에 방 안에서 자살을 해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머나먼 나라의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게임하지 말란다고 자살을 하고, 심지어는 부모를 죽이는 사건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야단칠 당시 말이 거칠었을 수 있고, 좀 때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설령 섭섭하고, 원망스럽다손 쳐도 그렇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동안 먹이고 입히며 키워준 은공은 다 어디 갔답니까? 한 마디로 은혜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가끔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 언급하면 ‘해준 것도 없는 부모’, ‘야단만 치는 부모’ 등등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건 아닙니다. 우리를 태어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큰 은혜요, 키워주셨다면 은혜 위에 은혜이며, 낳고 키워주셨다면 갚지 못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즉 낳아주신 것만으로, 길러주신 것만으로도 모든 것은 상쇄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야단 좀 쳤기로서니, 좀 때렸기로서니 자살을 해서 부모 가슴에 못을 박습니까? 더는 부모를 죽이고, 뚝 떨어진 곳에 버립니까? 천하에 나쁜 놈들이지요.
하긴 말하면 뭐합니까? 제가 기른 제자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요. 제가 30년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열 번 잘해주다가 한 번 서운하게 하면 쌩하고 돌아서는 자들이 있습디다. 잘 되라고 쓴 말 좀 하고, 야단 좀 친 것이 비위에 안 맞았나봅니다. 그간 ‘아버지, 아버지’ 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서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 하나 기르느라 애쓰고 기도하고 맘 쓴 건 기억조차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섭섭하지요.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살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주 앞에 할 말을 잃은 자들입니다. 영멸에서 영생으로 이끌어내신 것 하나만으로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강물을 먹물 삼아 기록한대도 부족할 만큼 넘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 된다고, 응답이 안 온다고, 제 뜻대로 안 된다고 ‘하나님이 있기는 한 거야?’ 라는 자들, ‘하늘이 무심하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받은 은혜가 한량없건만, 당장 섭섭하다고 그러는 겁니다. 이런 때 쓰는 말이 배은망덕(背恩忘德)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재앙을 만났지만, 그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라고 했습니다. 말인즉 복을 받을 때가 있으면 어쩌다 꾸지람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다는 것이고, 빨리 이루어진 것이 있으면 더디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백 번 맞는 말입니다. 어떻게 부모가 매일 듣기 좋은 소리만 합니까? 입에 쓴 약이 몸에 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 행실에 이로운 법, 징계가 없다면 곧 사생자입니다(히12:8).
여러분, 성경에는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국(結局), 결말(結末)이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다윗이요, 하나는 하눈이라는 사람입니다. 왕이 된 다윗이 어느 날 수소문 끝에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생존해 있음을 알고 그를 데려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9:7). 즉 기브아에 있던 사울의 소유지를 다 회복하게 하고, 왕과 평생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특권을 준 것입니다.
다윗은 은혜를 아는 자이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므비보셋의 경우 외에도 은혜를 갚은 일이 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실래라는 사람인데요, 그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마하나임에서 피난을 하고 있을 때 다윗군에게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제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공궤에 감사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바실래에게 동행할 것을 건의합니다. 은혜를 갚고자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실래는 자기 대신 아들과 동행을 원했고, 다윗은 바실래의 아들에게 그동안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은혜를 갚았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임종할 때 아들 솔로몬에게 바실래의 후예를 잘 대우하라고 유언합니다(왕상2:7). 이런 다윗의 결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13:22~23).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상29:28).
그러나 은혜를 저버린 자, 하눈을 봅시다. 하눈은 다윗의 친구 암몬의 왕 나하스의 아들이며 후계자입니다. 다윗은 나하스가 죽었을 때에 그에게 조객을 보내어 위로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눈의 방백들은 ‘다윗의 조객은 이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려 보낸 스파이’라고 하눈에게 충고하자 하눈은 그 말을 곧이듣고는 다윗이 보낸 문상객들의 수염을 절반이나 깎고 옷은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냈습니다. 후에 하눈은 그로 인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소바 아람사람 2만과 군대 1만 3천을 고용하여 다윗과 싸웠으나 요압에 의해 패하게 됩니다(삼하10:1~11:1, 대상19:1~ 20:3).
천사장 루시엘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 자가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을 배역했습니다(겔28:12~19). 그래서 하늘에서 쫓겨났고, 결국 하나님과 인류 최대의 적인 마귀가 되어 심판 날에 영원한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계20:2). 아비인 다윗의 은혜를 잊은 압살롬, 위경에서 건져준 다윗의 은혜를 모르고 시기에 혈안이 되었던 사울…. 그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아시지요? 당시는 그들이 기세등등해 보였지만,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은혜를 아는 자, 은혜를 갚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이고, 부모님, 선생님, 목사님, 형제, 이웃, 성도들, 남편과 아내, 그들에게 받은 은혜를 심비에 새기고, 감사하며 은혜를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잘 되는 길이고, 내 결국이 좋은 길입니다. 형제에 의해 노예로 팔렸던 요셉, 그러나 그것마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던 그가 받은 축복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창49:22~26).
부모도, 목사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사람이니까요. 그렇다고 쌩 돌아서면 안 됩니다. 조금 서운해도, 조금 화가 나도 그동안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세보면 다시 효도하게 되고, 다시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실수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과정을 둔 것뿐이니 쌩 돌아서면 더욱 안 됩니다. 나만 손해입니다.
은혜를 알아야 사람입니다. 미물도 은혜를 알진대 사람이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은혜를 안 다윗 같은 삶, 요셉과 같은 삶을 살아 그에 따른 복을 누립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살전3:9). 할렐루야!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갚는다
원수는 흐르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심비에 깊이 새겨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