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라는 말에 속지 말라 (욥1:1~22)
‘팔자’의 의미는 사람의 타고난 운수(運數)나 분수(分數)를 말하는데, 사람이 태어난 년(年), 월(月), 일(日), 시(時)를 간지(干支)로 나타내면 여덟 글자가 된다고 합니다. 이를 가지고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치던 데서 팔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대개 팔자를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팔자대로 살아야 합니다. 분수껏, 주제껏 살아야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왜냐?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그리고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팔자’라는 말은 상황이 좋을 때는 별로 쓰지 않습니다. 고난 중이거나 궁핍할 때, 병들었을 때, 어렵고 힘들 때 ‘팔자’라는 말을 많이 쓰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바로 그 때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것이 팔자가 아니라 나를 단련시키는, 나를 향상시키는 훈련임을 깨달아 운명을 바꾸는 기회 말입니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을 보겠습니다. 평화롭고 유복했던 욥에게 시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재산이 다 날아가고, 자식들이 다 죽고, 아내는 욕을 하며 떠났습니다. 더욱이 몸에는 악창까지 났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은 누구나 ‘팔자’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결국 이게 내 팔자구나.’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동굴 속에 처박힌 듯 컴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팔자타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되레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8~9) 하며 낙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부정으로부터 그의 입술을 지키며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고백했습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하며 대성통곡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욥42:10~17).
여러분,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분수를 뛰어넘어 꿈을 가질 때, 소망을 가질 때, 운명은 개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것이 그 여인의 팔자라고. 왜냐하면 그 여인은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녔지만 병이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막5:26).
그러나 그 여인은 팔자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고, 그 여인은 ‘내가 가서 예수라는 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는 병에서 나을 거다(막5:28)’라고 결심합니다. 그 꿈대로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나음을 입었습니다.
에스더, 그녀는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에 귀환하지 않고 바사에 머물러 있던 베냐민 지파 아비하일의 딸로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습니다(에2:7). 그래서 에스더는 그의 사촌인 모르드개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고아인 에스더에게 꿈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팔자대신 무한한 꿈을 주었고,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를 폐위하고 왕비를 간택할 때 에스더를 궁으로 이끌고 가 마침내 왕비로 만들었습니다(에2:17).
여러분, 욥처럼 고난 중에 있습니까?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 병중에 있습니까? 에스더처럼 타고난 환경이 불우합니까? 그래서 ‘이건 내 운명이야. 팔자대로 살지.’ 하고 인생을 체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이 고난 중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처럼 정금을 만들기 위함이며, 당신이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병상에 있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당신이 에스더처럼 불우한 환경 속에 처해 있는 것은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아비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이유 없이 동굴 속에 쳐 넣으시겠습니까(마7:11)?
여러분은 지금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고 있을 뿐입니다. 잠시 후면 눈이 부시도록 환한 세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팔자타령이나 하고 있다면 터널이 동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38년 동안 아팠다면 이건 분명히 불치병으로 팔자라고 생각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병을 끼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랜 병자여서 베데스다 연못물이 동할 때 남들보다 먼저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물에 들어갈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겁니다. 그러나 그 꿈을 보시고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병도 인격체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꾸짖지 않습니까? 고로 병도 끼고 앉아서 대접하면 절대 안 가게 되어 있습니다. ‘팔잔데’ 하면서 병을 대접하는 자에게 병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 병을 떠받들고 있으니 당신에게서 왕 노릇하며 떠나가지 않는 겁니다. 가난도 그렇습니다. 팔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난을 인정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가난이 당신에게서 왕 노릇하며 떠나가지 않는 겁니다. 가난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쫓을까요? 그것은 내 마음과 생각에서 내쫓는 겁니다. 내 안에 분수를 넘는, 운명을 뛰어넘는 꿈을 간직하면 병도, 가난도, 고통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꿈은 분수라는 잣대를 대는 순간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네 분수에 무슨 의사가 돼?’, ‘내 분수에 무슨 유학이야?’ 이렇듯 분수는 꿈의 적입니다. 만일 입다가 분수를 차렸더라면 절대 길르앗 거민의 머리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입다는 기생이 낳은 아들로,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난 신세였기 때문입니다(삿11:1~3). 노예출신인 요셉이 가질 수 있는 꿈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의 한계를 깨고 노력하여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마음이 꽂혔습니다. 요즘 예수중심아카데미를 통해 우리 청년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들과 함께 메인스타디움 집회를 꿈꿉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가까운 사람들부터 그럽니다. “아이고, 이제 나이도 많은데 제발 일 좀 벌이지 말라.”고요. 분수를 알라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 생물학적 나이는 63세지만, 사회학적 나이는 25세입니다. 그만큼 내 꿈에 한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그 일을 하나 못하나 말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를 팔자라는 고리에 묶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좌절하게 하고, 현실에 안주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그리고 “생각이 결과라”(렘6:19)고도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팔자타령에는 음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들 팔자타령을 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팔자타령을 잘하면 하나님은 그 팔자대로 묶어버리십니다. 왜냐하면 민수기 14장 28절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러므로 생각과 마음을 지킵시다. 생명의 근원이 거기서 나니까요(잠4:23).
여러분, 팔자타령 말고 무한대의 꿈을 키웁시다. 그것이 당신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할렐루야!
생각이 궁색하면 삶이 궁색하고
생각이 풍요로우면 삶도 풍요롭다
꿈에 분수라는 잣대를 대면
꿈은 금방 죽어버리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