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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라 (히4:14~16)

656호 · 2012-09-21

구약의 하나님은 엄위(嚴威)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나가는 일은 심히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분을 뵙는 일이란 일반인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 일을 담당했습니다.

성막 안에 지성소가 있고, 그 안에 속죄소가 있는데 대제사장은 그 안에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일 년에 한 번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소통했습니다. 그래서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였습니다(레16:2~34).

그러나 지성소는 거룩한 곳이기에 대제사장이 죄를 가지고 가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옷 가장자리에 금방울을 달고 발목에 줄을 묶고 들어갔습니다. 만일 방울소리가 나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죽은 것이니 끌어내려고 말입니다(출28:31~34). 이렇듯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큰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단 번의 제사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히4:14).

그 증표로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그래서 그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대제사장도 두려워했던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 예수 이름으로 직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보좌란 ‘심판과 권위’의 보좌였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이후, 이제 하나님의 보좌는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은혜의 보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2).

이렇게 심판과 권위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가 된 것은 하나님의 본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과 시험을 친히 당하셨기에 체휼, 곧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체휼’이란 ‘동정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정을 공유하여 동정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시험을 당하셨고, 고통을 받으셨으며, 배도 고프셨고, 피곤함도 느끼셨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를 직접 체험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가 약한 것을, 우리가 고통 받을 때의 아픔을, 우리가 병들었을 때를, 우리의 외로움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다 아십니다. 100%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가 죄 지었을 때, 우리가 넘어졌을 때, 우리가 병들었을 때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왜 그랬냐? 넌 왜 맨날 그러냐? 왜 매일 그 모양이냐?” 이러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비록 우리가 병든 몸으로, 죄 지은 모습으로, 고난에 초췌한 모습으로, 시험에 흔들린 모습으로라도 주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그래, 잘 왔다. 얼마나 힘들었니?”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때에 따라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왜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8)”는 이 말씀 때문입니다.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좋고 합당한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슬픔이나 고난, 가난과 고통은 이해하려고 해서 이해되는 게 아닙니다. 체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도 있고, ‘과부가 홀아비 심정을 안다’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그 분도 우리를 진정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친히 인자(人子)로 이 땅에 오셨기에, 그것도 말구유에 나셨기에, 더욱이 시험을 당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에 우리를 온전히 이해하시고, 체휼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은혜의 보좌를 생각하면 이런 장면이 눈에 떠오릅니다. 엄하기만 하신 아버지 옆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는 모습 말입니다.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셔서 야단도 치시고, 혼도 내시는 아버지 곁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류하시며 “내가 겪어보니까 그러지 않습디다. 그러니 야단치지 마세요. 야단치지 않아도 쟤가 많이 힘들어요. 도와줍시다. 해결해줍시다.”

이러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마치 예수님의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중보자이신 예수님 말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피를 흘리며 낳으셨기에 더욱 애정을 쏟지요. 예수님도 당신의 피를 흘려 우리를 낳으셨기에 어머니의 마음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가 은혜의 보좌가 된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이는 곧 하나님의 보좌이며, 그곳에는 은혜가 넘칩니다. 거기로 나아가는 길을 예수님이 다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은혜의 보좌로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담대하게 말입니다. 우리의 중보자, 육체를 가지고 다 경험하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를 이해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담대하게 나가서 죄를 용서받고, 해결 받으면 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여섯 남자를 갈아치운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니 그가 용서를 받았고, 그에게 한없는 은혜가 넘쳐났습니다(요4). 베드로도 은혜의 보좌로 나아와 용서를 받고, 다시 기회를 얻었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 나음을 입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고, 그래서 주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에 은혜가 넘쳐도 그 앞에 나오지 않으면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영원히 죄인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의 죄가 너무 커서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어도 그 앞에 나왔더라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고, 베드로처럼 만회할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 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죄를 묻기는커녕 그를 품에 안고 잔치를 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나?’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뭐라 하시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지도 마세요.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어요.’ 라고 자책하지도 마세요. 때가 있으니 목욕탕에 가는 것 아닙니까? 때가 많으면 목욕탕에 못 간답니까? 평생 목욕 한 번 안해서 국수 같은 때가 뚝뚝 떨어지는 자나 엊그제 목욕해서 때가 조금 나오는 자나 때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죄나 작은 죄나 동일하게 다 죄입니다. 아무리 주홍 같이 붉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목욕탕에 가면 때를 벗기고 깨끗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부모 앞에 나오는데 어려워할 게 뭐 있습니까? 부모 앞인데 추한 모습이면 어떻고, 아픈 모습이면 어떻고, 죄 지었으면 어떻습니까? 육신의 부모도 그런 자식이 더 안쓰러워 품으실 텐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더욱이 보좌 옆에 예수님이 계셔서 중재해주시고, 우리를 체휼하실 텐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그러니 담대하게 나오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을 찢어 죄 많은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갑시다. 그 길만이 산 길이요,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거기서 안식과 평강을 얻으세요. 할렐루야!

과부가 과부 심정 알고

홀아비가 홀아비 심정 안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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