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용서는 내가 사는 길이다 (마3:1~12)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뿌리는 바로 용서에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에서부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용서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네가 네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면 너의 죄를 나도 용서할 것이지만, 네가 용서치 아니하면 나도 용서치 않겠다.’고 하나님께서 용서의 전제조건을 다신 것입니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냐?”고 하나님께 힐문하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을 위하여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비유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임금이 종들과 회계할 때 일만 달란트, 요즘 돈으로 약 1백억 원 정도의 돈을 갚지 못한 종이 있음을 알고 그 종을 불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소서. 빠른 시일 내에 다 갚겠습니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하도 애원을 하니 이를 불쌍히 여긴 임금이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고 그 종을 놓아 보냈습니다.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그 종은 신이 나서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약 2만 원가량 빚을 진 동료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그에게 빚을 독촉하며 당장 안 갚는다고 그를 고소하여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 만행을 지켜본 동료가 이 사실을 그대로 임금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대노하면서 그 종을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는데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며 즉시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수 좀 한 내 가족을, 작은 잘못을 한 내 성도를, 내게 조금 손해를 입힌 내 친구와 내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신 하나님이 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이웃이, 형제가, 가족이 죄를 지었기로서니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보다 크겠습니까? 그러니 백 번 용서해야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누가복음 17장 3~4절의 말씀처럼 회개한 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이 아니라 ‘용서를 비는 자’를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위에서도 종이 용서를 빌었기에 용서한 것입니다. 용서하라는 설교를 하면 성도들에게 가끔 항의전화가 옵니다. ‘돈 떼먹고 더 큰 소리치는데도 용서하라는 겁니까?’ 하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가 진정 회개하고 용서를 빌 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동일하게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먼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용서에서도 회개할 때 용서받듯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9~10).
사울을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은 아말렉의 모든 것을 죽이라고 했건만, 사울은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은 살려 취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어 이를 추궁하자 그는 변명만 늘어놨습니다(삼상15:15). 얼른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분명히 용서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아담도 그렇습니다. 그가 만일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실 때 그 앞에 나와 회개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역시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충신인 우리아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것을 안 나단이 죄를 묻자 그는 바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며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단이 다윗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곧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바로 눈물로 회개한 다윗,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한 이유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죄인이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씩이나. 죽을죄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것은 바로 회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이렇듯 회개해야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면 그 분은 용서하십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어떻게 다 잘하고 삽니까? 어떻게 죄 안 짓고 삽니까? 여러분, 죄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가 문제인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길선주 목사님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였습니다. 그는 예배 중에 “언젠가 제 친구가 죽으면서 ‘내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니 내 재산을 잘 처리해 주게’ 했는데 그 재산을 정리하면서 나는 일백 원(당시 화폐)을 잘라 먹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라고 회개했습니다. 이 통회자복이 온 성도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졌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1907년도 한국에 대 성령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회개가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십시오.
정리하겠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용서해야 합니다. 그를 용서해야 나도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용서의 조건을 내걸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하라는, 실수한 가족을 용서하라는, 너에게 손해를 입힌 친구를 용서하라는 간절한 바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얼마나요?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요.
하나님과 화해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형제와 화해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구하십니까? 그렇다면 형제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십시오.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원하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이것이 기독교의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2~14).
미루지 말고 지금 용서하십시오. 너무 시간이 지나버리면 용서하기 어려워집니다. 미움이 굳어져버려 정말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도 밥 먹은 후에 바로 해야 잘 씻기고 쉽게 씻기듯 용서도 씻어내야 하는 것이기에 빨리 할수록 좋습니다.
먼저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하나님 앞에 내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할렐루야!
용서는 힘 있고 능력 있고
강한 자들만의 특권이다
다시 범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임을 기억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