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으로 악을 이겨라 (마5:38~48)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위 말씀은 마태복음 5장 39~42절의 말씀입니다. 당신은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위 말씀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전혀 안면도 없는 사람이 다가와서는 이유 없이 오른뺨을 치면 얼른 왼뺨을 돌려대며 ‘이쪽도 치세요.’라고 말하라는 겁니다. 이웃집 사람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는 내 옷장을 열더니 “이 재킷 예쁘네. 가져가야지.”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미쳤어요? 왜 그걸 가져가요?” 그러지 말고, “아휴, 재킷만 가져가면 어떡해요? 치마랑 세트이니까 이것도 가져가요.”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또 직장동료가 일을 못해서 야근을 해야 하는데 당신더러 같이 하자고 졸라대는 겁니다. 내 일도 아니고, 나는 지금 약속도 잡혀 있는데 말입니다. 그럴 때 “미안한데 내가 바빠서.” 그러지 말고, 같이 밤새워주라는 겁니다. 야식까지 사주면서.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요즘 신문 보기가 무섭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 정말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가 새삼스러울 지경입니다. 지나가다가 어깨 좀 부딪쳤다고 사람을 때려죽이질 않나, 괜히 지나가는 여자를 끌고 가서 죽이질 않나…. 아파트 위층에서 애들이 뛴다고, 쳐다봤다고, 사귀던 여인의 마음이 변했다고 죽이는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이처럼 악이 창궐하고 있는 시대에 위 말씀을 받잡는다는 것은 사실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바보, 병신 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위 말씀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다시 이어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이렇게 할 때야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우리도 온전한 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종결짓는 방법은 악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악을 대적하면 악의 악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싸버리면 악이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선만이 악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요셉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요셉은 그의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애굽에 팔아넘겨 버렸습니다.
그 후로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지나 마침내 위상 높은 자가 되었을 때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얼마든지 형들에게 보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오히려 자기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두려워할 때에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8).
또한 세월이 흘러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혹시라도 요셉이 악을 갚겠다고 할까봐 형제들이 불안해 할 때에 요셉은 다시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요셉의 명언이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이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싶습니까?” 곧 이 말씀은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곧 원수 갚는 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악에 악으로 대항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신다는 요셉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아야할 것입니다.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자를 두고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렇듯 악을 선으로 이긴다는 뜻은 악인을 용서한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용서가 근간이 된 종교입니다. 용서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구원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이 적용되었더라면 어디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용서는 얼굴 용(容)과 용서할 서(恕)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얼굴을 용서한다, 곧 얼굴을 다시 본다는 뜻입니다. “용서했어.”라고 말하고는 다시 얼굴을 안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얼굴을 대하고 예전처럼, 예전보다 더 잘 지낼 때 진정한 용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악을 선으로 이긴 것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마귀의 일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일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 의인이 된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이같이 행할 때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잘 안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매스컴을 통해 제가 얼마나 많이 두드려 맞았습니까? 오죽하면 제가 신문사를 차려서 맞대응을 하려고 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제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나를 인간이하로 취급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고, 나를 개 패듯 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 성질에 그게 가능했겠습니까? 그러나 기도하니까 됩디다. 처음에는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지만, 점차 그들의 영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나옵디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저를 원수의 목전에서 높이셨고, 그들을 제 목전에서 거꾸러뜨리셨습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물고기는 짠물을 먹고 살지만, 짠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에 소금을 치면 짠맛을 냅니다. 왜 그럴까요? 살아있는 물고기는 짠물을 숙성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죽은 물고기는 그런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이 살아있는 자라면 내게 행하는 악을 숙성시키고 발효시켜 되레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의 소유자라면 악을 악으로 내치고 말 것입니다.
당신에게 악을 행한 자가 있습니까? 못할 짓을 한 자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를 박박 갈며 앙갚음 할 때만 노리고 있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다 당신이 먼저 지치고, 병나고, 악해집니다. 예전에 멕시코에 갔을 때 어느 정신병에 걸린 여인이 안수를 받으러 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어느 남자에게 강간을 당해서 그런다는 겁니다.
그 후로 그 사람을 죽일 생각만 하다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저는 그녀를 안수하기 전에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 처음에 그녀는 완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안고 계속 찬송을 부르는 사이에 그녀의 마음이 녹았고, 용서한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녀의 정신이 온전해졌습니다.
옛말에 ‘맞은 놈은 발 뻗고 자고,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용서하고, 나를 위해 악을 선으로 이겨야하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 앞에 온전한 자가 되고, 그 나라에서 큰 자가 되고, 내 마음이 편하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을 넘어 일거삼득이 아닐까요?
악인의 결국은 비참하나, 선인의 끝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깁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7~18). 할렐루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아라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자나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