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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호 목차 › 객원컬럼

약속의 무게

613호 · 2011-11-25

스위스 루체른의 한 작은 공원에는 회색빛의 사자가 등에 창이 박힌 채 죽어 가는 모습을 한 기념비가 있다. 그 유명한 ‘빈사의 사자상’이다.

때는 프랑스혁명이 한창이던 1792년 8월 10일. 기세등등한 혁명군들이 성난 파도와도 같이 루이 16세가 머물고 있던 튈르리 궁에 들이닥쳤다. 이들에 맞서 싸울 병력은 당시 궁전을 경호하고 있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 전부. 이미 전세는 기울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안 루이 16세는 그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저들이 보이는가. 나의 궁전을 빽빽이 둘러싼 저들이 보이는가! 저들 앞에 선 내 신세가 바람 앞에 흔들리는 꺼져가는 등불 같구나. 내겐 더 이상 그대들을 고용할 돈조차 없다. 이제 그대 모두는 각자 살길을 도모하라!”

이 때 비탄에 잠긴 루이 왕을 향해 용병들은 단호히 외쳤다.

“전하, 저희는 오로지 전하를 보호하겠다는 계약만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기위해 이 자리를 피해 도망간다면 훗날 그 누가 스위스인들에게 용병을 맡기겠습니까!”

그들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코 뒤로 물러나거나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왕을 보호하겠다’는 계약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전력을 다했다. 그렇게 장교 26명과 사병 760명은 모두 장렬히 산화했다.

죽음의 순간까지 맡은 바 자신의 소임을 다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저 기념비를 대하자니 순간 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 신뢰의 무게, 약속의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될까? 어떤 이에게는 손바닥 뒤집듯 너무나 가벼운 것일 테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이렇듯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한 언론에서 제법 의미심장한 설문 조사를 벌였다. ‘이 사회에서 법을 가장 안 지키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것이다. 1위는 바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경제인과 법조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안타깝고 또한 통탄할 일이다. 이는 이 사회 상위 계층의 도덕적 해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내 주는 결과가 아니겠는가!

법은 사회구성원 끼리의 약속이며 또한 신뢰의 표현이다. 아울러 ‘신뢰 지수’야 말로 그 사회가 얼마나 성숙한 사회인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척도가 된다. 그러한 것이 내 필요, 내 입장에 따라 그 때마다 기준이 달라진다면 우리는 결코 이 지구촌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이·삼류국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관계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선생께서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절, 한 동지에게 초대를 받았다 한다. 그의 16세 된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한 자리였다. 어찌 보면 당시에 안창호 선생 같은 분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게 하는 것 이상으로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축복은 없었을 것이다.

선생은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으니, 정보가 새어나가 일본 경찰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때문에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선생을 말렸다.

“선생님, 왜경들이 사방에 쫙 깔렸습니다. 지금 움직이시면 위험합니다.”

“위험해도 가야 하네.”

“지금 가시면 꼼짝 없이 잡혀가십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작은 약속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 내 어찌 어린아이와 한 약속이라고 허투루 여길 수 있겠나!”

결국 이 일로 인해 선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진퇴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처사라고 지적하고 싶은가? 하지만 안창호 선생에게 있어 약속의 무게는 바로 그러했다.

총회장 목사님은 종종 ‘약속을 잘 지키기 위해서 약속을 잘 안 하신다’고 공공연히 말씀하신다. 목사님께 있어 약속은 곧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가짜라고 할까봐 더욱 신중에 신중을 기하시려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선거철만 되면 ‘공갈 공약’이 판을 친다. 일단 당선되고 보자는 속셈인 겐지, 그야말로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이젠 국민 대다수가 정치를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신뢰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가치를 두는 만큼 힘겹게 얻어진다.

모든 것에는 무게가 있다. 지금 당신에게 있어 약속의 무게는 과연 얼마만큼 인가!

Joseph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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