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없는 영광은 없다
서울대, 수험생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곳. 자타공인 우리나라 제일의 명문대다. 서울대에 얽힌, 내 고향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옆 학교에 ‘평생소원이 서울대 가는 것’이라던 선배가 있었다. 허나 꿈은 실로 거창했지만 실력은 따라주질 않았나 보다. 그 때가 학력고사 시절이니 340점이 만점이었다. 그런데 그 선배 점수란 게 고작 160점 남짓. 그것도 체력장 20점을 합한 결과였다. 그 점수론 서울대는커녕 인근에 있는 지방대도 들어가기 힘든 터였다. 그러니 학교 체면도 있지 담임교사는 원서를 써줄리 만무했다.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래, 학교 망신시킬 일 있어?”
하지만 그는 생고집을 피웠다. 이 때문에 한참이나 실랑이가 벌어지고, 보다보다 답답했던지 진학지도실장이 와서 말리고, 교감선생님까지 가세해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교장실까지 불려 들어갔는데도 뜻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나중엔 그의 부모님까지 학교를 찾아와 통사정을 했다고 하는데….
‘선상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디 우짜겄소! 아따, 우리 아들 소원 한 번만 들어주쇼잉. 야?’
부모님까지 나서서 눈물로 강청을 하는데 어쩌랴! 어쩔 수 없이 원서를 써주었다나?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마침 지원한 학과가 미달되어 덜컥 합격해 버리고 만 것이다. 졸지에 그는 가문의 영광이요, 의지의 한국인이 되어버렸다. 이유야 어쨌거나 그렇게 하여 서울대에 들어가게 된 억세게 재수 좋은 선배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토록 어렵게 합격한 서울대를 그 선배는 채 일 년을 못 채우고 자기 발로 걸어 나와 버렸다. 왜 그랬을까?
애초에 기초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도무지 수업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 또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돌아갈 영광과 영예는 없다. 잠시 잠깐, 달콤함을 맛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는 없다. 영광을 맛보려면 먼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짜 치즈는 쥐덫에나 있다.
늦가을, 나무는 다음 봄을 위해 꽃눈을 준비한다. 그래서 이듬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얼마만큼 잘 준비했는지에 따라 그 열매가 달라지고 그 풍성함이 갈린다고 한다. 명품의 가치는 ‘희소성’과 함께 장인이 공을 들인 ‘땀의 대가’ 때문에 인정받는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대가를 치룬 만큼 가치는 더 할 것이다.
희디 흰 예복을 갖춰 입고 강단에 올라서기 전, 먼저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삶의 순간순간마다 심령을 도려내는 아픔을 경험해야만 했을 목사님의 고통을 우리는 가히 상상할 수 없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 뒤에 뿌려진 눈물의 씨앗이 또 얼마 만큼인지도 잘 모른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매 시간 쏟아질 은혜를 위해 흘려야 했을 땀방울이 또한 어떠했을지 우리는 결코 가늠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픔과 눈물이, 그리고 방울져 내리는 그 땀방울들을 통해 오늘의 예루살렘 교단이 섰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말세지말’의 끝자락에서 마지막 주자로서 쓰임 받기를 기도해왔다. 구원의 통로가 되기를 수도 없이 간구했다. 영원 세계에서의 보상을 바라보면서 쉼 없이 구하고 또 구했다.
그 바람대로 세기가 바뀌어 2000년의 해가 돋아 오르면서, 더불어 예루살렘 교단엔 세계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후 남미 대륙과 동구권은 물론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타오르고 있다.
열 고을의 권세는 결코 구호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의 경주를 다한 자에게 주어질 영예다. 때문에 ‘가든지 보내든지’, ‘무릎으로 힘을 보태던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힘을 모두어야 한다. 영적 전장에서 더 이상 전후방은 없다!
무임승차는 범죄 행위다. 대가를 치르지 않은 꽃다발은 곧 시들어 버리고 만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 육체에 채우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말자. 함께 전도인의 사명을 다하자! 그대여, 각자의 사명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설 때에 당당하기를 원하거든 마땅히 대가를 지불하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네 육체를 채우노라”(골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