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신 선물 (마28:1~20)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죽었다가 깨어나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 있어서 부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욥기서에도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욥14:12)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있으니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요? 사람은 다시 살 수 없으나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그 분은 다시 사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롬1:4).
그리고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시며 그 분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고 가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그 성령은 주님이 주신 선물임을 사도 베드로는 분명히 밝혔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그런데 부활이 없었다면 이 선물인 성령도 우리에게 오시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곧 그분이 가셔야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선물, 곧 성령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우리의 영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영이요, 아들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영혼이 사는 것, 우리 삶이 사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逆)으로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죽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가장 축복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각양 은사를 받게 됩니다(고전12:4~12). ‘은사’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정리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참으로 다양한데, 그 중에는 ‘믿음의 은사’가 있습니다. 물론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롬3:22), 여기서의 믿음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제한된 은사를 말합니다. 즉 이 믿음은 저 산을 명하여 바다에 옮기라 하면 옮겨질 줄 믿는 믿음, 곧 은사적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필수조건이지요.
밤새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을 했으나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 그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니 큰 물고기 153마리가 올라왔습니다. 이 기적은 바로 믿음이라는 바탕 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네가 믿느냐?”고 먼저 물으셨고, 기적을 행하신 후에는 꼭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심으로 믿음 위에 기적이 일어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하마터면 빼앗길 뻔한 아내를 다시 찾았고, 야곱은 강 건너간 가족과 재물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고, 이 믿음으로 인해 환난 중에도 요셉은 적국에서 국무총리 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올해 저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 한 해가 되자’는 슬로건을 제시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많겠지요. 그러나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부활의 주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곧 성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령을 찾으면 먼저는 영혼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삼서의 말씀대로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될 것이니 만사형통의 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삼1:2).
그렇다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난과 병과 저주 속에서 허덕이는 이유 말입니다.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는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는데 왜 우리가 이 모양이냐 하면 이는 우리가 성령을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우리를 단칼에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서서히 성령을 소멸케 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성령이 소멸되면 불이 나가고 어두움이 밀려오는 것과 같아 모든 것을 도적맞고, 헤매게 하고, 이리저리 넘어지고 다치게 합니다. 그러다 결국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되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검으로 마귀를 진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검이 녹슬었다면 휘두른들 마귀를 진멸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받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영접하다’ 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영접하고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적이 없으면 평안한 법이고, 훼방하는 자의 태클이 없으면 순탄하게 잘 나갈 수 있는 법입니다.
연장이 좋으면 일이 두렵지 않고, 무기가 좋으면 적군이 무섭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의 연장이며, 영적 전쟁터인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무기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한다면 죽기로 작정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단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셨기 때문이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사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함 속에서 이렇게 반듯하게 설 수 있었고, 핍박 중에도 이렇게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삶도 동일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과 보호하심이 있어야 영· 혼· 육에 승리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선물, 곧 성령은 사모하는 자에게 오십니다. 그 분은 지·정·의를 가지고 계신 인격자이시며, 우리의 의지를 절대 초월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사모하는 자에게, 환영하는 자에게만 오십니다. 즉 당신의 마음을 열 때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단비가 내려도 장독 뚜껑을 열어놓지 않으면 한 방울의 비도 장독에 들어가지 않듯, 당신 마음의 뚜껑을 닫아놓으면 절대 그 분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마12:31). 주님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말씀하심은, 성령이 들어가실 수 있게 당신이 안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부활이 이루어지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적 같은 삶을 살려면 믿음의 은사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셨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할렐루야!
연장이 좋으면 일이 두렵지 않고 무기가 좋으면 적군이 두렵지 않다
총구가 녹슬면 방아쇠를 당겨도 절대 총탄이 나가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