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자만이 감사를 안다 (살전5:18)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지켜야 될 3대 절기를 명하셨는데, 그것은 유월절(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입니다.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이며, 칠칠절(七七節)은 맥추절로서 봄 농사를 통해서 얻은 수확과 풍작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고, 초막절(草幕節)은 모든 가을 농작물의 수확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드리는 절기입니다.
이 초막절에는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에 제일 좋은 곡식으로 추수(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첫 유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에 인디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영국에서 종교탄압이 극심해지자 102명의 청교도들은 종교의 박해를 피해 영국 땅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1620년, 7개월 동안 노동으로 180톤의 배를 소유하게 된 102명의 청교도들은 감격하여 그 배를 메이플라워(5월의 꽃)호라 명명하고, 긴 항해 길에 오릅니다.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풍랑과 싸우며 65일 동안 망망대해를 지나 신대륙 아메리카에 발을 내딛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풍토병과 인디안 원주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해 겨울 동료 44명이 죽는 아픔을 견뎌야했습니다. 다행히 이듬해 봄, 인디언 추장으로부터 감자와 옥수수 종자를 얻어 농사를 지었고, 그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는데, 제1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했고, 그것을 3대 대통령인 제퍼슨이 폐지했다가 16대 대통령 링컨이 다시 법으로 환원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버려야 했고, 잃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정든 고향, 직업… 이 모든 것을 희생했고, 풍랑과 싸워야 했으며, 배고픔과 인디언의 추격 등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 땅에 도착하여 그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교회를 세우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얻은 첫 수확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된 미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미국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선조가 고난 중에도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화폐인 달러에는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겁니다. 신뢰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국이 세계 제일의 국가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범사(凡事)’란 모든 일을 말합니다. 모든 상황과 모든 환경을 뜻합니다. 곧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좋을 때 뿐 아니라 나쁠 때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처럼 고국을 등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하고, 폭풍을 만나도,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도, 굶주림과 한파로 동료가 죽어나가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격에 조금만 금이 가도, 물질에 조금만 손해를 입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 있어?’ 하며 불평하지 않습니까? 감사할 것이 있어야 감사하는 거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마귀가 하나님께 이렇게 참소했습니다. “하나님,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데 왜 그런 줄 압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셨는데 감사 안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신 걸 다 쳐보세요. 그럼 그도 별 수 없을 걸요? 하나님을 원망할 겁니다.”(욥1:9~11).
욥이 감사할 조건이니까 감사하는 것이지 감사할 조건이 아니면 그도 원망할 거라고 하나님께 이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 대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란 걸 아셨기에 마귀에게 욥을 붙이셨습니다. 그래서 욥은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이 죽고, 몸에 악창이 나 기왓장으로 긁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보고는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 욥은 까무러쳐도 시원찮은 판에도 불구하고 원망이나 불평 없이 감사했습니다. 왜요? 그는 지금까지 누리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갑절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볼까요? 그는 예수로 인하여 매 맞고 헐벗으며, 정처가 없고, 후욕과 핍박을 당함은 물론, 만물의 찌기처럼 취급을 받아도 그는 감사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왜요? 바울은 깨달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뭘 깨달았느냐면,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라는 것입니다. 고난에 함께 참예해야 그 날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그 영광은 지금의 고난에 비길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깨달으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는 12월 22일은 저의 목회 2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제가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면 저 역시 목회 25년을 걸어오면서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 없는 사막이요, 눈 덮인 산야라고 표현할 만큼 제 목회는 고난과 핍박과 모함의 연속이었음을 잘 아실 겁니다. 교계에서 제명을 당했고, 또 어머니로부터 내쫓김을 당하고, 가족이 떠나는 등 안팎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이 제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감사했습니다. 왜요?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더욱이 당신의 거룩한 종으로 삼아 제게 능력을 주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성을 나타내게 하시는데 제가 어찌 불평을 하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 감사를 드려도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감사는 항암제요, 소독제요, 방부제요, 성장촉진제입니다. 감사를 하면 인생이 암에 걸리지 않으며, 황충이 먹지 않으며, 좀이 슬지 않고, 늦게 된 자로서 먼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평을 하면 광야 길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안식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인생이 더디 되고, 고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도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 집 가훈이 ‘흐르는 물 한 컵을 떠줘도 은혜를 잊지 말라’입니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해줬습니까? 음식점에서 점원이 깍두기 한 접시 더 줬습니까? 당연하다 그러지 말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아내에게 ‘고맙다’라고 말하는 것에 인색하지 마세요. 남편이면 당연히 돈 벌어와야 한다고 하지 말고 ‘감사하다’라고 말하세요. 그리고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하세요. 또 직장 상사, 부하 직원에게 감사하세요. 목사님께, 그리고 성도님들께 감사하세요. 그러면 모든 관계가 물 흐르듯 원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둥병 열 사람을 고쳤는데 아홉은 그냥 가고 사마리아 이방인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주님이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17:17)고 물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삶은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범사에 감사하는 자들이 됩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할렐루야!
감사란 느낄 감(感), 사례 사(謝)이다 은혜를 아는 자 만이 감사할 수 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고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