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먼저 ‘우리’를 생각하자
멕시코 꽈싸꽐코스(Coatzacoalcos) 집회로 가는 길에 경유하게 되는 멕시코시티(Mexico city) 공항에서 우리는 참 감명 깊은 장면을 보게 되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영상이었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이미 장애인 고용문제에 대해 멕시코시티 공항의 탁월한 정책에 대해 소개한 바 있지만, 이번에 보게 된 장면은 그들의 장애인 고용정책의 심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국내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짐을 끌며 좁은 2층 통로를 이용해 국내선 청사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사람이 눈에 뜨였다. 그는 승객들 사이를 헤치며 바닥을 닦고 있었는데 그가 비틀거리는 이유를 가까이에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두 팔과 다리가 온전하지 못한 장애인이었다. 두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보니 밀대 위에 두 손을 얹고 절뚝거리며 가는 힘을 이용해 밀대를 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스쳐지나간 후, 우리는 갈 길을 재촉하느라 그를 오래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은 없었지만, 탑승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는 그 일 외에는 할 수 없어 보였다. 청소밀대를 몸에 거치하는데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보였다. 정상인처럼 꼼꼼하게 청소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청소를 마친 후, 도구를 가지런히 정리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중증 장애인인데도 멕시코시티 공항에서는 그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일전에 소개했던 것처럼 멕시코시티 공항 곳곳에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안내를 담당하거나 티켓 검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본 그 청소부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일의 성격에 따라 인력을 배치한다기보다 장애정도에 따라 일을 분배한다는 원칙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정책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장애인 고용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심도 있는 정책을 엿볼 수 있었다. 목사님도 그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으셨던 모양이다.
“우리도 예비 장애인일 따름이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공항을 다닐 때마다 장애인들이 정상인들과 다름없이 제 역할을 담당하며 일하고 있는 모습에 참 깊은 인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꼭 본받아야할 정책이다. 사회적 약자에게도 일할 기회를 주고 서로를 깊이 배려하는 마인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중증장애인이라도 그가 일할 의사가 있다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책무다.”
사회곳곳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충돌로 이어지는 까닭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더불어 사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만 옳고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주의,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 지역, 우리 집단만 살고보자는 지역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가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에게 절망을 안긴다.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한다. 배타적인 생각과 자세를 버려야 한다. 인간을 향해, 세계를 향해 열린 자세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내 앞마당만 살피는 근시안적 사고는 국가사회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열린 마음으로 좀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고, 국제적 안목과 시야를 가지고 인간과 세계에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목사님이 자주 강조하시는 ‘우리’ 정신은 갈수록 악해지고 각박해져가는 오늘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아닐 수 없다.
“나보다 먼저 우리를 생각해야 한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거미 같은 자나 나만 살고 보자는 개미 같은 자는 옳지 않다. 아름다운 봄날,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꿀을 채취하고 서로를 따스하게 이어주는 삶, 나아가 위기가 왔을 때, 적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밖에 없는 침을 날려 가족과 사회를 구하고 산화하는 꿀벌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나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구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국가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했던 우리의 선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고통과 죽음을 이겨낸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바로 ‘우리’를 생각하는 정신의 정수(精髓)인 것이다.”
‘나’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리’를 생각하는 큰 그릇이 되자.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모습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