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자는 공짜를 싫어한다
이튿날 아침, 집회장 바로 옆에 위치한 꽈싸꽐코스(Coatzacoalcos) 컨벤션센터에서 실업인 세미나가 열렸다.
시장, 상공회의소장 및 임원들, 그리고 많은 사업가들이 세미나장을 찾았다. 이미 남미 지역에 탁월한 명강의로 정평이 나있는 터라 그들은 목사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세워 경청하며 진지한 자세로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은 2시간이 넘게 진행된 강의를 통하여 사람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셨다.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들은 전 지구촌을 뒤지다시피 하며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인재만이 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원이 없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지극히 작은 국가나 기업이나 세계 초일류의 경쟁력을 확보하며 승승장구합니다.
싱가포르나 대한민국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들은 교육을 최우선시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오늘날에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 지구촌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지식기반사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누가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맡은 분야에 몰입하여 부지런히 연구하고 분석하며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붓는 인재가 절실합니다.
성경도 잠언을 통하여 거듭 강조하는 것이 게으른 자를 피하고 부지런한 자를 쓰라는 것입니다. 똑똑한 자보다 정직한 자를 쓰라는 것입니다. 한국 속담에 ‘등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기에는 심하게 구부러져서 쓸모없는 나무 같으나 그 나무가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똑똑하다 하는 자들은 잔꾀를 부리며 단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정직한 자에게 완전한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매사 부지런한 자, 정직하고 성실한 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일을 맡기면 틀림없습니다. 기업의 목적은 폐일언하고 이윤창출에 있습니다. 하나님도 많은 이익을 남긴 자에게 더 많이 맡기셨습니다. 많은 수익을 남겨서 가난한 자들을 돕고 국가사회의 발전과 지구촌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것이 기업하는 자의 소망 아니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과연 어떤 자와 일하고 있습니까?”
목사님의 열정적인 강의에 실업인들은 박수를 보내며 적극적인 찬동과 지지를 보냈다. 여러 질문자들이 나서서 사업에 관한 목사님의 고견을 들었다. 그런데 맨 앞에 앉아있던 한 여인이 일어나 질문하기 시작하자 장내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져갔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 공짜를 좋아하고 거래를 할 때도 너무 터무니없이 깎으려들고 그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그녀의 질문에 냉소를 던지고 있었지만, 목사님은 그녀를 단상 앞까지 나오라고 하시곤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해주었다고 격려하셨다.
“당신은 정말 오늘 내가 꼭 전해야할 말을 빼놓고 있었는데 기억나게 해준 사람입니다.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결코 공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한 대가를 지불하기 원합니다.
그들은 성공에 무슨 왕도나 첩경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수고의 눈물과 땀을 흘린 만큼, 그 대가를 지불한 만큼 열매를 거둔다는 사실을 뼈저린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날아갑니다. 에덴동산을 거줘주었더니 허무하게 빼앗기고 만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결코 거저 주지 않으십니다. 천국도 예수를 믿어야 가는 겁니다.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겁니다. 절대 공짜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아는 자는 절대 공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4:30)
목사님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고 단지 그녀의 질문에 적극 공감을 표하신 셈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바로 세미나를 열고 있는 컨벤션센터 운영의 모든 책임을 총괄하고 있는 실무담당자였다. 제대로 짚은 셈이다. 성령께서 하신 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목사님의 집회와 세미나 등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큰 은혜를 받는 모습이었다.
목사님은 세미나를 마치며 실업인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다.
“닭은 장닭인데 울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잡아서 먹어치워야죠.”
“우는 장닭으로 바꿔야 합니다.”
“울게 만들겠습니다.”
각양각색의 답변들이 나왔다.
“못 운다고 잡아먹는다니 참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장닭이라면 분명 울도록 만들어진 닭입니다. 나 같으면 그 닭이 울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주겠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지요. 산이 나무를 위해 존재합니까? 나무가 산을 위해 존재합니까?”
전자를 택하는 사람도 있고 후자를 택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사님은 이 비유적인 질문을 통해 실업인들을 향한 마지막 메시지를 던지셨다.
“나무가 어릴 때는 산이 나무를 위해 존재하지요.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해줍니다. 그러나 나무가 장성해지면 나무가 산을 위해 존재하게 됩니다. 뿌리를 깊이 내려 산사태도 막아주고 많은 낙엽으로 산의 토양을 기름지게 하고, 활발한 광합성 작용을 통해 산을 건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사주와 종업원의 관계도 이러합니다. 노사가 화합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뢰와 협력이 바탕이 된 기업이라면 그 어떠한 위기도 능히 극복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갈 것입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 같았다. 세미나를 마칠 시간이 되었지만 그들은 질문을 그치지 않았다. 저녁집회가 있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강의를 마쳐야 했다. 그들은 흥분과 아쉬움 속에 목사님께 거듭 사의를 표했다.
둘째 날 집회는 첫날보다 더욱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둘째 날 저녁집회는 한국시간으로 주일 아침시간과 맞물린다. 우리 성도들이 성전에 모여 합심으로 이 집회를 위해 기도해주는 시간인 것이다. 그 기도의 위력을 절감할 수 있었다. 목사님이 입버릇처럼 우리 성도들의 기도를 믿는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령의 뜨거운 역사 속에 목사님은 엑토르(Hector)와 카메라를 잡고 있던 라구나(Laguna), 그리고 달라스(Dallas)에서온 정용복 장로까지 불러 귀신을 쫓으라고 명령하셨다. 귀신이 드러나 소리 지르며 요동하는 성도들이 쉴 새 없이 단상으로 들려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때 단상 위는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터지는 전장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영적 세계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 단상 위에 있다가는 혼비백산 달아날 것이 뻔하다. 목사님을 경호한답시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들이 이런 광경을 보고는 무서워서 단상으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보아왔다. 이게 인간의 힘과 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을 힙 입어 예수 이름의 권세로 수행하는 영적 전투이기 때문이다.
목사님은 단상과 회중 속을 수시로 오가시며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성령세례를 주셨다. 처처에서 귀신이 드러나 소리를 지르며 요동했고, 성령이 임하며 방언이 터지는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났다. 늘 보아오는 장면이지만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목사님이 단에서 기도를 시작하시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처처에서 귀신들이 드러나 소리를 지르며 요동한다.
목사님이 회중 속으로 들어가 머리에 손을 얹으면 역시 약속이나 한 듯이 방언이 터진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런 장면이 지극히 당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분명한 표적이며,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