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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집안일은 앞장서서 해야 한다 (눅14:12~24)

487호 · 2009-06-26

몇 해 전인가,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고, 목회자로서 마음가짐을 다시 추슬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으로, 당시 독일군 점령지였던 폴란드에서 독일군은 유태인들을 무참히 죽이기 시작합니다. 독일군들은 수많은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내 한꺼번에 죽입니다.

쉰들러는 목숨을 담보로 한 유태인 처자를 꼬드기기도 한 파렴치한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고 나치 당원이 됩니다. 나치 당원이 되면 인건비를 안들이고 유태인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을 고용하면서 점차 유태인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고용한 유태인 회계사를 통해 우연히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잠자던 양심이 깨어납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가진 돈으로 유태인들을 구할 생각을 하고는 유태인 명단을 작성합니다. 일명 ‘쉰들러 리스트’입니다. 그 리스트에 기재된 자들은 학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쉰들러는 자신의 전 재산으로 브릿니치 수용소에서 무려 1,100명의 유태인들을 구해냅니다.

그러다 독일이 패망하자 쉰들러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그가 나치 당원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쉰들러를 통해 목숨을 구했던 사람들이 쉰들러가 어디를 가더라고 안전할 수 있도록 그에 대한 탄원서신을 쓰고 자신들이 서명한 종이를 손에 쥐어줍니다. 그들을 떠나는 쉰들러가 자신의 옷에 있는 금배지를 만지며 자신의 회계사였던 유태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금배지를 팔았더라면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자막과 함께 이스라엘 텔아비브 영웅의 공원에 있는 오스카 쉰들러의 묘지가 보입니다. 거기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귀하고 기쁜 일은 없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쉰들러가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가는 자들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유태인들이 비참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 유태인을 구했기에 독일이 패망했을 때 그의 생명도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동일합니다. 많은 영혼들이 아우슈비츠 가스실보다 무서운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대해 수수방관하고 있다면 당신은 참으로 악한 자로 주님이 오시는 날, 당신에게 피 값을 물으실 것입니다.

쉰들러의 명단에 오른 사람은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들어가지 않고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명단에 오른 사람, 즉 생명록에 기록된 자는 지글지글 끓는 지옥불 속에 던져지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구원 얻을 자를 위해, 당신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천국잔치를 배설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초청을 거절합니다.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는데 바쁘다는 겁니다. 할 일이 많고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밭을 샀으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랬더니 주님이 노하여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곧 소외된 자들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멸시를 당하며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지 못한 버려진 자들을 불러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주인이 말합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설득을 해서라도, 사람을 사서라도 잔칫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즉 잔칫집을 채우는 것은 종의 열심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도 열심히 누비고, 길과 산울가로도 가고, 그것도 안 되면 강권해서라도 잔칫집을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일에, 구령사업에 네 열과 성을 다 쏟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주님의 음성이 우리 성도들 귀에 들리기 바랍니다. 쉰들러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유태인을 구원했듯이,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지옥으로 떨어져가는 영혼들을 건졌으면 합니다. 아니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니까요.

그런데 교회가 천국잔치를 배설하든 말든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자들이 있다면, 더 나아가 ‘그런 번폐스러운 일을 왜 해?’ 하며 훼방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지엄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집안에 결혼식이 있는데, 큰 아들이 되어서 회사 일 때문에 못 온다고 하면, 둘째 녀석은 중요한 시험이 있다고 못 오고, 딸은 시댁에 일이 있다고 못 온다고 하면 그의 부모가 “오냐, 그래라” 하겠습니까? 저라면 당장 그런 놈들은 호적에서 빼버릴 겁니다.

“이놈들!” 할 겁니다. 자식이라면 응당 미리 결혼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나 살피고, 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십시일반(十匙一飯)이나마 도와야 합니다. 또 당일에는 일찍 와서 안내도 보고, 피로연 준비 상황도 보고, 부모님도 챙겨야 합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부천 집회를 했을 때, ‘이번에는 인천교회 주관이니까 나는 그 날이나 참석하면 되겠지.’, ‘아휴, 부천까지 어떻게 가? 그냥 쉬지.’, 더 나아가 ‘에이, 모르겠다. 바쁜 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나?’이런 태도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놈’ 하시지 않겠습니까?

전도 집회만 천국잔치가 아닙니다. 주일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천국잔치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자리가 텅 비어 있다면 그 잔치가 흥겹겠습니까? 잔치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왜 잔칫집의 자리가 비느냐 하면 부한 자, 힘 좀 있는 자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눅14:13). 이 말씀은 산상수훈의 말씀과도 상통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언젠가 제게 한 성도가 찾아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강남 쪽에 교회를 세우세요. 그 쪽에는 부자가 많아서 십일조도 많이 나올 겁니다.” 그래서 그 때 제가 이렇게 말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님은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의 친구로 남겠습니다.” 그럼요, 주님이 부자들과 권세자들의 친구로 오셨다면 처음부터 말구유에 눕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천국잔치에 모시고 와 그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정말 전도하는 일에 대단했었습니다.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열성이 많이 식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는 첫사랑이 식은 거지요.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 대한 사랑이 식자 솔로몬이 떠나가지 않습니까?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아5:6).

늘 말하지만 사랑은 동사(動詞)입니다. 사랑하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어 있고, 그 분을 자랑하러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강요일 수 없는 겁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어놓고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다 거절했습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방주되신 예수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내와 골목으로 뛰면, 길과 산울가로 뛰면, 나아가 강권한다면 천국잔치에 자리가 가득할 것입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할렐루야!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사랑은 동사(動詞)다 사랑하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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