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으로 만족한 므비보셋 (삼하19:24~30)
어느 왕이 중전과 여러 후궁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과인이 이제 나이가 많아 주변을 하나하나 정리할 필요를 느꼈소. 그래서 우선 중전과 모든 비(妃)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까 생각하다 그대들의 소원 하나씩을 들어주기로 결정했소.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거든 하나씩 말해보시오.” 사실 왕은 중전을 비롯한 후궁들이 왕의 권좌, 곧 왕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인지,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것인지가 궁금하여 이런 계책을 마련한 것입니다.
여인들이 이런 사실을 알 바 없지요. 그러니 그저 왕의 말에 모두들 반색을 하며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영광이 될 것인가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먼저 중전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세자책봉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됩니다. 그것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자 왕은 쾌히 이를 승낙했습니다.
이어 서열순서대로 후궁들이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사대문 안에 있는 땅을 달라’,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한 동생에게 한 자리 달라’ 등…. 그런데 맨 마지막에 들어온 어린 후궁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치마 안에서 큰 보자기를 꺼내 바닥에 펴놓으며 말했습니다. “전하, 저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다만 전하만 모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전하만 이 보자기에 들어오십시오.” 이 말에 왕은 감격했습니다. “진정 나를 사랑하는 자는 너뿐이구나. 나를 얻었으니 무엇이 부족하겠느냐.”
진정한 사랑은 ‘~불구하고’입니다. ‘왕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왕의 것들, 곧 왕을 통해 얻는 권력과 부귀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지, 진정 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들은 어떠한 이유로 왕이 권좌에서 물러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왕을 배척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다들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 많던 무리들이 성혈이 낭자한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다들 모른다고, 저런 자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냐고들 했습니다. 왜요? 예수를 통해 더 이상 얻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때문에’ 사랑과 ‘~불구하고’의 사랑은 가짜 보석과 진짜 보석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가짜 보석인지 진짜 보석인지는 문질러보고 두드려보면 압니다. 동일합니다. ‘~ 때문에’ 사랑, 곧 가짜 사랑은 문질러보고 두드려보면 다 압니다. ‘~ 때문에’ 사랑은 조금 힘들고, 조금 어려움이 오면 금방 변하고, 또 권력이 깨지고, 부귀에 흠집이 나면 바로 사랑도 깨져버리고 말지요.
오늘 본문의 다윗을 향한 므비보셋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다윗의 것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향한 진실된 사랑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로 그들이 전사할 때 난을 피하여 가는 도중에 유모의 부주의로 절뚝발이가 된 불운아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므비보셋이 마길의 집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데려다 기브아에 있던 사울의 소유지를 다 주고, 한 상에 식사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줍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피신을 하려고 할 때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는 음식물을 나귀에 싣고 다윗을 맞고는 므비보셋을 참소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며 기뻐한다고. 다윗은 이런 므비보셋이 괘씸하여 므비보셋에게 준 모든 것을 시바에게 넘겨주고 떠납니다.
다행히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고 다윗이 승리하고 다시 궁으로 돌아올 때 므비보셋은 초췌한 모습으로 다윗을 맞습니다. 그는 거기서 시바의 참소에 대해 해명하자 다윗은 시바와 밭을 나누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19:30).
‘다윗 왕이 무사히 돌아온 것으로 자기는 족하다’는 겁니다. ‘나는 밭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신 당신 하나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오해하셨든 말든, 내 것을 취해서 괘씸한 시바에게 주셨든 말든, 나는 당신, 다윗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불구하고’의 사랑이지요.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바실래를 아십니까?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마하나임에 피난하고 있을 때, 바실래라는 노인은 다윗과 다윗군에게 식량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다윗이 승리하고 궁으로 복귀하면서 이 노인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는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삼하19:36). 바실래는 아무런 대가 없이 다윗 왕을 도운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고 존경했기에 봉사한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빼앗겼던 모든 것을 찾아서 돌아오자 소돔 왕이 나와 그를 맞으며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이렇게 말하지요.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4:23). 아브람이 재물에 유념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족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곧 그의 상급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불구하고’ 사랑하십니까? 예수 한 분만으로 족하십니까? 아무 조건 없이 예수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합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이 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의 말대로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저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분 한 분이면 됩니다. 왜요? 므비보셋의 고백처럼 죽은 개 같은 저를 돌아보신 그 분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그것보다 큰 은혜를 입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을 사랑함으로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이지,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은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불구하고’의 사랑이기를 원하십니다. 요나는 그것을 물고기 뱃속에서 깨달았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2:4).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의 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고백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졌음을 성경을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는 자, 예수를 사랑하기에 대가 없는 봉사와 희생을 바치는 자,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과 은혜가 쏟아질 것입니다. 왕을 택한 어린 후궁이 왕의 것까지 차지한 것처럼 말입니다.
백문백답(百問百答)이 예수, 천문천답(千問千答)인 예수인 삶, 예수로 족한 삶, 예수 때문에 사는 삶이 될 때 예수에 속한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로 만족하십시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할렐루야.
폭풍이 쳐야 바다가 정화되고 바람이 불어야 해충이 떨어진다
사랑은 절대 수단이 아니다 순수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