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를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다 (삼하6:16~23)
막노동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린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아들 녀석이 아침부터 신발을 사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신발이 다 닳았다는 겁니다. 신발을 보니 다 닳아서 구멍이 날 정도였습니다. 가슴은 아프지만 도무지 형편이 안 되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아들을 나무라서 학교로 보내고는 아버지는 일터로 향했습니다. 마음이 좋을 리 없지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않고 어두운 표정의 그를 보고 현장소장이 한 마디 합니다.
“김씨,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나?” 그러자 그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현장소장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리는 겁니다. 깜짝 놀란 그는 “소장님, 왜 그러십니까? 제가 잘못이라도….” 하며 따라갔더니 소장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가 다가가 “소장님!” 하고 불렀더니, 소장이 눈물을 닦으며 “자네가 부럽구먼.” 하는 것 아닙니까. “소장님이 제가 부럽다고요? 자식 신발 하나 못 사주는 제가 부럽다고요?”
그러자 소장이 말했습니다. “내게 딸 하나가 있다네. 그런데 그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소아마비라 아직 신발 한 번 신어보지 못했다오. 자네는 아들이 건강해서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니 얼마나 행복한가? 내 아이도 그렇게 뛰어다녀서 신발 사달라고 졸랐으면….”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감사했습니다. “그래, 아들 녀석이 건강해서 마구 뛰어다녀 신발이 닳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차 세울 데가 없다고요? 차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차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니 감사해야죠. 요즘 종부세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데 투덜거릴 것이 아닙니다. 집이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출근이 이르다고요? 일자리가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당신은 일자리가 있는 거네요. 그러니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수출이 저조 하느니, 살기가 어렵다느니 하는데요. 그래도 먹을 것이 지천으로 깔렸잖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 쩔쩔 매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요. 멀리 볼 것도 없이 바로 윗동네인 북한만 보더라도 사는 게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감사가 절로 나와야 합니다.
‘think’(생각하다)와 ‘thank’(감사하다)는 원래 어원(語原)이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생각하게 되면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감사할 수 있다는 거구요, 기존의 생각을 조금 바꾸면 불평하던 것들이 감사거리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은 종살이를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나타나 애굽에서 자기들을 구출해 주기를 늘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셨습니다. 진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찌했습니까? ‘덥다’, ‘춥다’, ‘물이 없다’, ‘고기가 없다’고 계속 불평만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제 압박 속에서 살다가 해방이 됐는데, 어떤 사람이 “그 때가 나았어. 그 때는 일본 사람이 쓰다 남은 찌꺼기라도 있어서 살만 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좀 덥고 춥더라도 해방된 것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기 좀 먹겠다고 종살이 합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불평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3).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까 보따리 안 건져줬다고 투덜거리는 거랑 똑같은 겁니다.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사51:1). 다윗은 과거 하찮은 목동에서 왕위에 오르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법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는 날, 너무 기뻐 뛰며 자기의 몸이 드러나도록 춤을 춘 것입니다. 이것을 본 그의 아내 미갈이 체통을 운운하며 다윗을 책망하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6:21).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1:12~13). 교회를 핍박하던 과거를 돌아보면 지금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런 자를 택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주의 종으로 불러 주셨으니 핍박이 온들, 환난과 기근이 온들 무슨 대수겠느냐 오직 감사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저 역시 사도 바울의 심정과 동일합니다. 농사꾼의 자녀인 저를, 세상에서 온갖 죄 가운데 살았던 저를, 잘 나지도 못한 저를 주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더욱이 주의 종으로 부르셔서 이 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맡겨주신 것을 생각하면 절대 힘들다는 소리가 안 나옵니다. 까짓 핍박이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think’ 하면 ‘thank’ 할 수 있는 겁니다.
천칭(天秤)이란 것이 있습니다. 한 쪽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추를 달아매놓고, 다른 쪽에다 내가 달고 싶은 것을 올려놓는 저울인데요,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정해진 추보다 내가 달고 싶은 것이 가벼우면 ‘감사’하고, 내가 달고 싶은 것이 무거우면 ‘불평’하는 걸로요. 정해진 추가 뭐냐 면요, 우리의 구원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과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정해진 추에 올려놓고 반대쪽에 다른 것을 올려보는 겁니다.
먼저 요즘 힘든 경제를 올려볼까요? 어느 쪽이 가벼울까요? 당연히 힘들다고 볼평했던 경제지요. 올려보니 감사해야겠지요? 사고로 몸을 다쳤습니까? 절대 가벼운 일은 아니지만, 이 천칭에 일단 올려보겠습니다. 마귀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보다 그것이 무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자녀가 속을 썩입니까? 이 천칭은 그래도 당신이 감사해야 함을 알게 할 것입니다. 기업이 도산했습니까? 힘드실 것입니다. 절대 가벼운 일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지옥 불에서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래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 쫓기면서도, 아들 압살롬을 피해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이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를 생각하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욱 넘칠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감사하려들면 감사할 것이 무진장합니다. 그런데 왜 감사하지 못하는 줄 압니까? 너무 올려다보기 때문입니다. 소망은 높은 데 두어야 하지만, 감사는 내려다볼 때 나오거든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것, 맘 놓고 먹을 수 있는 것, 학교 다닐 수 있는 것, 마음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사는 것…. 이 모두가 감사할 일들입니다. 헬렌 켈러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압니까? 딱 3일간만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부모 형제 얼굴 한 번 보고, 아름다운 산야 한 번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당신은 매일 가족을 보고, 매일 아름다운 산야를 보지 않습니까?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나를 돌아다보면 더욱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과거보다 못하다고요? 그렇다면 아름다운 과거를 갖게 하신 것에 감사하면 되겠네요.
범사에 감사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할렐루야.
불행은 불평하는 자의 것이고
행복은 감사하는 자의 것이다
불평은 성난 파도와 같으나
감사는 잔잔한 호수와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