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조직검사를 하라 ( 말 1:1~2:3 )
지금은 기업이 된 설렁탕집이 있습니다. 을지로에 있는 진국 설렁탕집인데, 그 집에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집은 늘 제일 좋은 사골만을 우려내 설렁탕을 만들어서 그 맛이 좋다고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항상 하던 대로 사골을 아무리 오래 고아도 뿌연 국물이 안 나오는 겁니다. 이상하다 싶어 주인은 사골을 단골로 대주는 정육점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정육점 주인이 하는 말이 “아휴, 죄송합니다. 다른 음식점 사골하고 바뀌었네요. 사장님, 오늘 하루만 국물에 크림을 좀 넣으세요.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맛도 비슷하고요. 다른 집은 다 그렇게 하거든요.” 하는 겁니다. 전화를 끊고 사장은 정육점 주인 말대로 오늘만 국물에 크림을 넣을까 하고 아내에게 의논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비록 설렁탕을 팔고 있지만, 이 설렁탕을 예수님께 드린다는 심정으로 만들고 있는 것 아녜요? 예수님께 크림 탄 설렁탕을 드릴 건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그는 알았다는 듯 아내 등을 툭 치더니 종이에 몇 글자를 적어 음식점 문에 붙이고는 셔터를 내렸습니다. 뭐라고 썼는지 압니까? “죄송합니다. 오늘은 재료가 좋지 않아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내일 좋은 재료로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손님들은 더욱 이 설렁탕집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일개 설렁탕집을 기업으로 일궈내게 되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진심으로, 진실로 손님에게 대접했기 때문입니다. 설렁탕집도 예수님께 드린다는 심정으로 진정으로 손님을 대하는데, 우리는 과연 예배에 어떤가요? 당신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그냥 교회 뜰만 밟고 가지는 않습니까? ‘무슨 말이냐? 나는 한 번도 예배시간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항변하는 자가 있을 겁니다. 예, 출석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낯을 뵙는 것, 하나님과의 만남을 뜻하는 것일진대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억할 만큼의 만남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크림 탄 설렁탕이 아니라 진국으로 드렸느냐는 것입니다.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중에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막5:30)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생님, 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밀리는데 누가 선생님께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면 곤란하지요. 한 둘이 댔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 많은 무리 중에 진정한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자신임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이 놓여 건강할 지어다”(막5: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이런 결과를 낳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 내 문제가, 내 병이, 내 간구가 응답 받게 되어 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지만, 다 병이 낫고, 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허다한 무리가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지만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만이 하나님께 아는 바 되고, 기억된바 되며, 소원하는 바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비유를 봅시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사람 모두 교회에 다닌 사람을 가리킵니다. 버림을 당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요? 하나는 주님과 진정한 만남을 가진 자고, 하나는 교회의 뜰만 밟은 자입니다. 하나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 자고, 하나는 예수님 언저리만 돌고 간 허다한 사람 중의 하나라는 겁니다.
이제 당신을 돌아보십시오. 암도 조기진단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기검진을 받는 것처럼, 당신의 예배 자세도 오늘 점검해야 신앙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나는 과연 혈루증 앓는 여인처럼 진정한 만남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허다한 무리들 중의 하나인가 말입니다. 하나님은 밝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크림을 탄 설렁탕을 내놓은 자들, 예수님의 언저리만 돌다간 허다한 자들에게 엄히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말1:8).
또한 봉사를 할 때 내게 진정이 있었는가도 진단해봐야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돼.’ 하는 심정으로 우쭐해서 봉사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일 ‘그래, 까짓 해주지.’ 하는 마음으로 봉사한다면 지금 그만 둬야 합니다. 일하고 벌 받지 말고, 놀고 물음 받는 편이 낫습니다.
철산리에서 목회 시절, 어느 부흥강사 목사님의 간증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분은 성도 시절에 성가대 지휘자로 있었는데, 목사님과 마찰이 좀 있었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 성가대가 찬양을 하려고 다 일어섰는데, 그는 목사님을 향하여 서서는 보란 듯이 지휘봉을 반으로 꺾고 밖으로 나가버렸답니다. ‘나 없이 어디 성가대 해봐라.’ 했던 거죠. 그런데 3년 후, 그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그만 허리가 딱 부러지고 말았다지 뭡니까. 그는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환상 한 장면이 눈앞에 지나가는데, 바로 지휘봉을 부러뜨린 그 장면이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방성대곡을 하며 교만했던 자신을 회개했답니다. 그리고 허리가 완쾌된 후 그는 목사가 되어 진심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불평불만이 있다면 암 초기입니다. 봉사하면서 우쭐대고 있다면 2기 정도 됐겠네요. 지금 조직검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치료가 가능할 것이고,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헌금을 드릴 때는 어떻습니까? 무슨 동냥하듯 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없어서 십일조 드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첫열매를 거둬가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獻金)은 바칠 헌(獻)입니다. 그냥 내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 입장료 내듯, 목사 설교료로 내듯 해서는 안 되고 오직 감사함으로 즐겨내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왜 유명한 줄 압니까? 진심을 얹어 드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어느 집사가 아주 가난하게 살 때의 일입니다. 내일이 애들 소풍가는 날이라 친척집에서 만 원을 얻어서는 철야예배에 온 겁니다. 그런데 헌금 시간이 되니까 자꾸 그 만 원을 드리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돈으로 내일 애들 김밥을 싸야하는데 말입니다. 속으로 얼마나 갈등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집사는 헌금 바구니에 만 원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애들 김밥 쌀 돈이었습니다. 다 아시죠?” 다음 날, 애들을 빈손으로 소풍 보냈는데, 애들이 다녀와서 잘 먹고 왔다고 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가세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엘리사에게 먹을 것을 대접한 과부의 심정으로 드렸더니 하나님이 감동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봉사와 헌금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예배하고, 봉사와 헌금을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그 기쁨이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와 자비로 쏟아질 것입니다. 진국 설렁탕처럼 진실은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안 통합니다. 하나님 앞에 흠 없고, 점 없는 마음과 몸과 헌물을 드리세요. 기쁨으로 봉사하고 일하세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시련의 고통보다
후회하는 아픔이 더 크다
수리형이 되지 말고
점검형이 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