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미래를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 히 12:1~8 )
한 집사님이 제게 찾아와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 집사님은 대학 재학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답니다. 지금 뵈어도 상당한 미모를 지녔으니 젊은 시절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미모의 소유자였을 겁니다. 거기다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까지 했으니 너무 잘 나가는 케이스여서 모든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답니다.
그런데 부러울 것도 없고, 걱정도 없이 살던 그 집사님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즈음, 갑자기 남편이 사고로 눕게 되었고, 더불어 경영하던 사업체가 파산지경에 이르러 당장 생계마저 어려운 상태가 된 것입니다.
집사님 말에 의하면, 정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답니다. 더구나 손끝에 물 하나 묻히고 살지 않던 이 집사님이 가계를 꾸려야 할 판인데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가게를 낼 형편도 아니고, 식당에서 그릇이라도 닦고 싶었지만 너무 곱상하게 생겼다고 받아주는 곳도 없었답니다.
돈은 급하고… 해서 그 집사님은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떼어다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았답니다. 평생 해보지 않은 고생이었지만, 공부 시켜야 할 자식들을 생각하고, 앓아누워있는 남편을 생각하면 다리품 파는 것도, 머리에 생선을 인 것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목에서 “생선 사세요.” 하며 외치고 가는데, 이게 웬일 입니까? 대학 동창이 저쪽에서 걸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 이 집사님은 갈등했답니다. “저 친구를 피해야 하나, 아는 척 해야 하나? 저 친구가 나를 보고 뭐라 할까? ‘잘 나가더니 꼴좋다’ 그러지 않을까?” 그러다 이 집사님은 “내가 나쁜 일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하고는 친구를 먼저 아는 체 했답니다. 물론 그 친구가 놀란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간의 사정을 들은 친구가 “이 생선 다 내려놔.” 하더니, 생선 모두를 사주고는 대학 동창들과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재정적인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이 이야기 끝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목사님, 아이들과 남편을 생각하니 부끄러운 것도, 힘들 것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렇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부끄러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곳, 곧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까? 이 집사님에게는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남편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래서 아이들이 잘 자라 훌륭하게 되고, 남편도 예전처럼 건강을 되찾으면 예전의 영광도 찾으리라는 미래를 미리 보고, 미래를 알기 때문에 고통과 수치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참으신 까닭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이루실 영원한 승리, 곧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을 위해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시고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 분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고, 더불어 미래를 확실히 아셨기에 멸시(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와 고통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후욕과 핍박을 당하며,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오직 푯대만을 향하여 곧 복음을 위하여 달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8장 18절에 그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분명한 목적과 미래를 아는 자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과 한 상에 앉아 떡을 떼며(눅22:30), 열 고을을 다스릴 권세(눅19:17).” 이것이 저와 우리 성도들의 목적이요, 미래의 우리 자화상입니다. 이를 위해 저와 우리 예루살렘 교단의 성도들은 명예롭지 못한 많은 타이틀, 이단이요, 광신자라는 핍박과 모함을 이겨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번 우크라이나 집회를 갔을 때, 키르기스스탄의 선교사인 라빈 선교사가 찾아와 선교의 애로사항을 설명하며, 독일로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영주권 없이 선교하기가 갈수록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다면 네가 그 나라 국적을 취득하면 되겠네.” 했더니, 라빈 선교사가 “그러면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데요. 그건 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호통을 쳤습니다. “아니, 주를 위해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주의 종이 되어 가지고, 한국 국적 포기하는 것조차 못해서 어디에 쓰겠니? 너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늘나라 시민권이 아니냐?”
태릉선수촌에 많은 국가 대표선수들이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몇 개월 동안 세상과 단절하며 피나는 훈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래를 알기 때문 아닙니까? 올림픽에 나가서, 아시안 게임에 나가서 메달만 따면 평생 충분한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 여자가 궁둥이에 종기가 났습니다. 먼저 한 여자가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그 여자에게 “옷을 내리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여자는 “아이고, 망측해라. 어떻게 남자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있어요?” 하며, 황급히 병원을 빠져나갔습니다. 그 다음 여자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왔습니다. 의사는 동일하게 “옷을 내리십시오.” 했더니 이 여자는 아까 그 여자와는 달리 부끄럽지도 않은 듯 옷을 쓱 내리는 겁니다.
의사는 종전의 여자가 생각나서 웃으며 “안 부끄러우세요?” 하고 물으니 여자 환자는 “종기를 짜야 낫는 거잖아요. 부끄럽다고 옷을 안 내리면 어떻게 짜요?” 하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부끄러움도 잊을뿐더러 더는 낫는다는 기쁨이 있기에 종기를 짜내는 아픔을 견디는 겁니다. 산모가 엄청난 진통을 어떻게 이겨냅니까? 곧 아들을 얻는다는 기쁨, 곧 엄마가 된다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LPGA(미국 여자프로골프) 명예 전당에 오른 박세리 선수를 보십시오. 그녀의 아버지는 도저히 여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지옥 같은 훈련을 시켰습니다. 박세리의 아버지는 “이 훈련이 비록 고되지만, 이 훈련을 통해서 너는 세계적인 골퍼가 될 거야.”라고 늘 어린 세리에게 말해주곤 했답니다. 박세리의 아버지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딸이 세계적인 골퍼가 되는 미래를 미리 그리고 보았기 때문에 아비로서 딸이 흘리는 눈물과 땀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김대중 전(前)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前) 대통령이 숱한 고난과 모함을 받으면서도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나도 한 번 대통령이 되고야 말리라.”는 변치 않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면 오해와 모함이 다 풀리는 미래를 알았기 때문에 감금과 연행을 당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자가 누구인 줄 압니까? 인생의 목적, 신앙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이며, 미래를 모르는 하루살이 같은 인생들입니다. 남들이 볼 때 우리는 한 없이 불쌍한 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왜 편히 살지 저렇게 험한 길을 자처해서 가나?”, “왜 즐기며 살지, 저 고된 훈련을 왜 받나?”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확실한 목적과 미래를 아는 자의 행복을 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지금 고난 중에 있습니까? 지금 고통 중에 있습니까? 지금 병들었습니까? 당신의 목적이 분명하다면, 당신이 미래를 확실히 안다면 당신은 고난에서, 고통에서, 그리고 병을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목적이 당신 삶을 이끌 것이고, 미래가 당신에게 독수리같은 새 힘을 줄 것입니다. 할렐루야.
목적이 분명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목적이 분명한 자는
우선순위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