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계 5:1~14)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어머님의 은혜’라는 노래는 있는데, ‘아버님의 은혜’라는 노래는 없을까?”, “왜 사모곡(思母曲)은 있는데, 사부곡(思父曲)은 없을까?”, “왜 모든 자식들이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와 은혜에 사무칠까?” 하는 생각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해산의 수고로 낳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애를 낳기 전에 댓돌 위에 신발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애를 낳으러 들어갔다고 합니다.
“다시 이 신발을 신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아기 낳는 것은 힘들고 여차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철없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 한 편이 저려오고,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에 머리가 숙여지고, ‘정말 살아계실 때 잘해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왜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서입니다. 피 흘려 우리를 낳으신 것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1:4~7).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리던 영광이 엄위하심과 의로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영광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고, 영생의 길로 인도하신 한량없는 감사와 사무친 은혜 때문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은 본래 영광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성육신하시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후의 영광은 그 전의 영광에 비길 수도, 견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후에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눅22:69).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리스도 되신 예수를 찬양해야 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왜요? 우리가 구차한 형편에 처해있더라도, 우리가 설령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가 혹여 슬픔의 터널을 건너고 있더라도 그 형편과 고난과 슬픔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는 비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심과 우리를 사랑하심이 우리의 형편과 사정보다 월등히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때문에 모함과 핍박을 받는다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푼 은혜와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뻐하며 찬송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받은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 분으로 인해 감옥에 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저 역시 어떠한 역경 중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우리 주님이 그 귀하신 피를 흘려 대속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족하기만 한 저를 당신의 제자로 삼으사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그 은혜에 할 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대신 죽어준답니까? 물론 피 흘리며 나를 나신 우리 어머니는 나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이 나대신 죽는다고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영멸의 세계에서 영생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머니는 희생의 제물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속은 물론이요,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우리 주님만이 나를 죄에서 속량할 수 있고, 나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물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 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그 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 힘들다고 불평하는 것은 환경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여건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린 것은 그의 환경이 견딜 만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굴에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그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봅시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시57:4). 그는 날카로운 이빨과 혀를 가진 사자 앞에 선 것과 같은 위태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립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9~11).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그의 뜻을 좇아갔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사 영광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영광의 길을 갈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우리가 주를 믿음으로 의문의 수건은 제거될 것이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 영광을 직접 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로 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영광의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 말며, 어려움 중에도 신앙을 굳건히 지키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한 마디로 이것을 잘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결코 녹녹치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며 묵묵히 이 길을 가면 우리도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신 주님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간직하면 신앙생활에 불평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노예 되었던 애굽에서 탈출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에 불평한 것입니다. 은혜를 안다면 목 좀 마르다고 불평했겠습니까? 고기 때문에 불만을 토 했겠습니까?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은혜를 잊어도 자식이라 할 수 없겠거늘, 죄인에서 의인으로 다시 나신 하나님과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호흡이 있는 동안에, 우리 생명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그 분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은 물론이고, 우리를 향하신 그 끝없는 사랑을 찬양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리고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고 또 전합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할렐루야.
잎이 떨어져야 가지가 보이듯
믿음은 고난 중에 나타난다
생명 있는 동안에
생명주신 주님을 찬양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