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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요 8:31, 32 )

409호 · 2007-12-26

오래 전 미국에서는 노예를 사고팔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의 일입니다. 한 판사가 노예들이 왜 계속 도망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도망치는 노예를 붙들고 물었습니다. “주인이 먹을 것을 안주던가?” “아닙니다. 먹을 만큼 주셨습니다.” “그럼, 일을 호되게 시키던가?” “아닙니다. 혹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럼 잠자리가 영 형편없었나?” “아닙니다.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전혀 휴식시간이 없었나?” “아닙니다. 가끔 여유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친 거야? 도망칠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말이야.”

그러자 노예는 조심스레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님, 제가 나온 자리는 아직 비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판사님이 그 자리에 가시겠습니까?”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이를 잘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걸고 찾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민족의 자유였습니다. 유관순 누나가 목숨을 담보로 무엇을 얻어냈습니까? 일제 치하로부터 자유였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평생을 바쳐 일군 것 역시 백인으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자유! 이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걸고 찾아야 할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저도 자유를 위해 제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물론 저는 독립투사는 아닙니다. 제가 부르짖는 자유는 육적인 자유보다 더 귀한 바로 ‘영적 자유’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는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의 삯은 사망인고로 사망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망을 쥐고 있는 악한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악한 마귀는 우리를 억압하고, 가난하게 만들고, 병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묶고 있던 죄의 노예 사슬을 풀어주시며 ‘자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찾아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고, 그로 인하여 죄 때문에 가로막혔던 하나님과의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한 손에 하나님의 손을,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 손을 잡아 화해시켜주셨습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려 함이니라”(롬 5:21).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죄를 짓기 전처럼 의인이 된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사망 대신 생명을 얻게 되고, 죄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저는 주님이 주신 이 자유, 주님이 피 뿌리면서까지 우리에게 건네주신 자유를 전국과 전 세계에 전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주의 제자가 되기로 했고,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한 주님의 조건을 응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29,30). 이 자유,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 모든 것을 버렸고, 더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장차도 그럴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제 심중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23년 동안 저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진리요, 이 진리로 인하여서만이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제가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 70여 개국을 메주 밟듯 밟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리기 위해, 그 분으로 인하여서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기사와 표적을 보이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세계 구석구석을 가보면 아직 이 진리를 접하지 못함으로 인해 죄의 노예로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볼 때면 제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없고, 그래서 제 발길은 더욱 바빠지기만 합니다. 어느 부자인 부모에게 두 딸이 있다고 칩시다. 큰 딸은 공부도 잘하고 부모 속도 썩힌 적이 없는 요샛말로 모범생인 반면, 작은 딸은 공부는 뒷전인데다 부모 마음은 헤아릴 줄 모르는 딸입니다. 이 두 딸이 결혼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남편들이 사업에 촐랑 망해서 오갈 데도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큰 딸은 정말 부모님께 다가갈 면목이 없어 간신히 끼니를 연명하며 궁색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작은 딸은 남편과 자식과 함께 친정을 당당히 찾아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시집갔으면 그만이지, 어디다 손을 내미냐?”고 해도 작은 딸은 여전히 할 말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낳았으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닙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어머니는 ‘잘 왔다’며, 아버지를 회유하여 결국 다시 재기할 사업자금을 끌어냅니다. 작은 딸이 왜 당당하고 자유 합니까? 이는 그 부모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큰 딸이 부모 마음을 잘 헤아리는 효녀 같지만, 그녀는 자녀의 권세를 몰라 자유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인이 되었고, 더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1:12). 그러므로 하나님께 당당히 구할 수 있습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예수로 인하여,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에 부자 아버지를 두고 가난하게 살고, 명의(名醫)인 아버지를 두고 병들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집안에서 검은 커튼을 쳐놓으면 빛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커튼을 젖혀야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자유하지 않습니까? 넘어지지 않고, 잃어버린 것도 찾을 수 있고, 길도 알게 되고, 사람도 분별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46).

그런데 아직 커튼을 쳐놓고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커튼 때문에 빛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두운 데서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죄 때문에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아직 자유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커튼을 젖혀주는 것, 빛이 왔다고 외치는 것이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죄에서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리는 자유, 주님이 주신 자유를 공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을 드려 우리에게 안겨준 이 자유를 더 많은 자녀들이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가 일궈낸 민족 해방을 대한의 전 민족이 누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땅 끝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지 않으면 보내기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이 자유를 주님의 백성들이 다 누릴 때까지 말입니다. 이것이 제가, 그리고 여러분이 꼭 해야 할 일입니다. 할렐루야!

죄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문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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