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글씨 크기 보통16
407호 목차 › Text 주일설교

산 경험과 죽은 지식이란? ( 요 16:1~24 )

407호 · 2007-12-12

저도 목회 초기에는 설교문을 작성하여 설교를 했었습니다. 나름대로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을 밟으며,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해서 멋진 설교를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반응은 썩 신통치 않았습니다. 더구나 한 번은 국문학을 전공한 성도로부터 국문학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핀잔까지 들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후로 저는 전혀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저는 모르니 제 입술을 온전히 주의 뜻대로 주장하여 주소서.”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데, 제 입에서 말씀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닙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씀들이 막힘없이 나오는 겁니다. 전하는 저도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을 대언하는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설교 걱정을 안 합니다. 단 위에서 학잠을 자고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제 입술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성도들이 은혜의 바다에 푹 들어가지요.

사도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있던 일입니다. 본시 아덴란 곳은 철학적으로 뛰어난 곳이며, 우상이 들끓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실 지식적으로 따진다면 바울도 만만치 않은 자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과 쟁론도 하고, 변론도 하고, 그들 수준에 맞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이 헬라의 문화인들에게는 적합한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사람들의 조소와 반대에 부딪쳐 바울은 설교를 중단해야 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譏弄)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행17:32).

아덴에서 전도에 실패한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 이르러 이교도들의 강한 세력과 철학자들의 사변과 교만한 태도, 그리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인간적인 중압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그런 그가 작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3~4).

즉 무엇을 전해야 할지, 어떻게 전해야 할지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아덴에서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바울은 제대로 안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서나 혈통을 내세우는 베냐민 지파 앞에서나 민족적 자랑을 일삼는 히브리인이나 종파를 거론하는 바리새인 앞에서나 지식을 들이대는 교법사 앞에서나 정치적인 우세를 내세우는 로마 시민권자 앞에서나 말과 아름다운 지혜로 아니하리라.” 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예비하신 십자가의 비밀을 어떻게 인간의 말이나 지혜로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고전2:7~8).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면 절대로 깨달을 수 없고, 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성령의 감화하심으로만 알게 됩니다. 왜냐고요?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고 통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0). 그래서 바울이 담대하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다시 생각해 봅시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고, 예수님이 안수하여 귀신을 쫓는 등 성경에 기록된 일들을 세상의 지식이나 지혜로 풀고 전할 수 있답니까?

피타고라스의 원리로 푼답니까?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답니까? 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시각으로 곧 성령으로 감화되어야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실 때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던 많은 자들이 기이히 여겼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배워서 가르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6). 베드로가 어떻게 한꺼번에 3천 명씩을 회개시켰습니까? 그의 지식으로요? 아니요, 그는 본시 지식이 없던 자입니다. 그가 그리 한 것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요즘 교회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육적인 교회, 혼적인 교회, 그리고 영적인 교회, 이렇게 나뉘고 있지요. 육적인 교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문제가 되는 것이 혼적인 교회입니다. 사람의 지식을 구사하여 혼을 만족시키는 교회, 말씀을 푼다는 명목아래 아름다운 말을 나열하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수수께끼를 풀듯 풀어내는 것도, 학문을 배우듯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하나님의 감동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배우러 다닐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성령이 성경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제가 해외집회에 나갔다오면 그것을 편집해서 성도들과 함께 봅니다. 그것을 본 사람 중에 더러는 “맨날 똑같은 거네요?”라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똑같을 수밖에요. 성령의 감동 따라 주 예수가 구원자임을 전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 전부이니 똑같은 것이 당연합니다. 사복음서를 보십시오. 주님이 하신 말씀이 똑같고, 그의 행하심이 똑같지 않습니까?

저 역시 그 이상 어떤 것도 할 생각이 없고, 주님이 하신 일 외의 것을 할 능력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저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저를 맡길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오직 기도에 전무할 뿐이지요.

성령이 없는 교회는 건물에 불과하고, 성령이 없는 심령은 사람의 자녀에 불과하며, 성령에 의존하지 않는 목사의 설교는 연설이지 결코 말씀의 선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연설이 사람의 영을 만족시키고 감동시킬 수 없는 법. 이는 시간의 낭비요, 에너지 낭비입니다.

성령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 아십니까? 어느 아비가 오랫동안 해외에 가면서 딸을 불러 말합니다.

“아빠가 너에게 돈을 주고 가겠다. 이 돈만 있으면 네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단다.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뭐든 살 수 있고, 언제든 아빠에게 전화도 할 수 있단다. 그러니 돈을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라.” 아빠는 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넘겨준 것이고, 그것의 가치에 대해 알게 함으로 귀중함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 보좌로 올라가시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16장 말씀입니다. 악한 영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세상(엡6:12)에서 믿는 자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어떤 것이 가장 값진 것인지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행5:3~4), 그 영이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시니 무엇이 걱정이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목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 두려운 것은 아덴에서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성령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있어 가르치시고,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며, 위로하시고, 증거하시며, 책망하시니 우리의 삶은 승리와 기쁨, 그리고 위로뿐입니다. 나의 경험을 문화적인 지식 앞에 팔아먹지 마세요. 내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왜 의심하고 두려워합니까? 목회가 어렵다고요? 성령을 갈구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세상을 이길 힘이 없습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오. 할렐루야!

성령의 역사가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건물이다

물없는 곳의

고기는 어떻게 될까?

407호 다른 글

커버스토리
지혜의 말씀
귀를 기울이세요
Cartoon
붕우칼럼
선교기행
나눔의 지혜
잠언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