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자와 소극적인 자의 차이 (계 3:14~17)
컵에 물이 절반 있는 것을 보고 비관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걸로는 갈증을 해소할 수 없어.” 그러나 낙관론자는 다릅니다. “반 컵의 물이라도 있으니 정말 감사하군.” 또 같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자는 “물이 반 컵 밖에 없네. 어쩌나.” 하지만 긍정적인 자는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았어.”라고 말합니다. 소극적인 자는 이런 경우에 “반 컵의 물로 만족해야지, 내가 어쩌겠어?” 하나, 적극적인 자는 “어서 다 마셔. 내가 어디 가서든 물을 구해오지.” 합니다.
같은 상황에서 각기 달리 나타나는 발상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경우에 속하십니까? 저는 당연히 낙관론자요, 긍정적인 자요, 적극적인 자에 속합니다. 더불어 거기에 현실을 감안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철인이 이렇게 말했지요. “돈을 잃었느냐? 아무것도 잃은 것이 아니요, 명예를 잃었느냐? 반을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었느냐? 다 잃은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잃은 것을 다시 다 찾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믿음이라는 적극적인 사고와 자세를 갖추면 됩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밤늦은 시간에 친구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친구가 찾아왔는데 먹을 것이 없자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늦은 밤에 찾아와 보리떡을 강청하는 친구가 반가울 리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못들을 소리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결국 보리떡을 얻어 돌아와 자신의 집을 찾은 친구를 대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11:8).
맞습니다. 사업이 부도 위기입니까? 지금 기업이 벼랑 끝에 서 있습니까?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까? 이럴 때 “난 별 수 없어, 아무도 안도와 줄 거야.” 하고 비관하고 부정적인 사고에 휩싸여 있다면 별 수 없이 망해야지요. 부도나야 합니다. 굶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보리떡을 강청한 자의 자세가 된다면,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는다면 분명히 당신은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이 비유의 말씀 뒤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11:9,10).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는 얻고, 찾고, 문이 열려 만사형통한다는 말씀입니다. “네 생각을 바꿔라.” 하신 것입니다. 즉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네가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말씀하신 게지요.
잃은 명예도 찾을 수 있냐고요? 물론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를 봅시다. 제가 생각하기로 여자 혼자 사니 이런 저런 불명예스런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혼자 사니 별별 소리 다 듣는구나. 버선목이라야 속을 보여주지.” 하고 낙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매일 재판장을 찾아가 재판장이 듣던지 안 듣던지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런다고 재판장이 콧방귀나 뀌었겠습니까? 그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저 혼자 잘 난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도 무릎을 꿇는 경우가 있더란 말입니다. 바로 안 통할 것 같은 사람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적극적인 자에게는 무릎을 꿇고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눅18:5).
그러면 여기서도 주님의 다음 말씀을 봅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눅18:7,8). 즉 안하무인인 재판관도 적극적으로 매달린 자에게 손을 들거든, 하물며 무엇이든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못 줘서 안달이 나신 우리 아버지께서 적극적으로 매달리고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겠느냐 이 말입니다.
적극적으로, 열과 성을 다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중언부언하는 기도 말고 확실하고 적극적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통탄이 이어짐이 웬일입니까?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모든 자들이 문제 앞에서, 위기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비관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 앞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더는 부정적이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정말이지 용신할 틈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도저히 예수님 곁으로 갈 수 없자 지붕을 뚫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주님은 분명히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곧 그들의 적극적인 행동에 감동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병도, 문제도 이렇듯 해결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적극적인 자만 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전쟁이 치열한 최전방에 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상에서 기업 간에, 개인 간에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고, 영적으로도 악한 것들과 싸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비관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 그리고 미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이 험한 세상과 영적 세계에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적극적인 사고와 자세를 가진 자만이 전쟁터에서 살아날 수 있는 있습니다. 적극(積極)이란 말은 쌓을 적(積), 다할 극(極)으로, 대상에 대해 혼신을 다하는 것, 즉 능동적이며 긍정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끌어내라고 하셨을 때 모세는 미온적이었고, 비관적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하나님이 능력의 표징을 보여줘도 모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그러나 모세는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랐고 확신이 서자 그는 담대하고 적극적인 자가 되어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적극적인 자가 됩니다.
골리앗 같은 문제가 앞에 있습니까? 다윗처럼 적극적인 방법을 택하세요. 사울을 비롯한 모든 자들이 ‘도저히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 할 때 어린 다윗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일을 수습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1장에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어디 천국뿐입니까? 이 세상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미온적인 믿음의 소유자, 소극적인 믿음을 가진 자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땅이 안 팔리면 재개발을 하고, 건물이 안 팔리면 리모델링을 하듯, 당신 인생에 진전이 없다면 당신의 성격을 바꾸세요. 긍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적극적인 성향으로. 그래야 승리(Victory)합니다. 할렐루야!
미지근한 물에는
대장균만 득실거린다
쇠가 달구어졌을 때
내리쳐야 한다
